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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카 Feb 15. 2021

'뇌 없는 도시'라는 미래

온나라 정책연구라는 사이트에 들어가면 중앙정부와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발주한 정책연구과제 결과물이 올라와있습니다. 정부가 사업을 하려면 사전 연구를 해야 합니다. 세금으로 만든 자료라 모든 결과물은 이 사이트에 공개합니다.


게시된 정책연구를 보면 지방 소재 대학 연구팀의 자료가 꽤 많습니다. 지자체에서 발주한 과제를 그곳에 있는 대학 연구자가 수행하는 경우가 많아서죠. 포항시 버스 노선 개선 용역을 한동대에 맡기고, 김제시의 흡연 관련 연구를 원광대에 맡기는 식입니다. 지역 문제를 주로 맡기다보니 그 곳의 대학이 전문성을 갖춘 경우가 많습니다. 업무 진행이 편한 점도 있고요.


지방 소재 대학의 교수는 지자체의 각종 위원회에 이름을 올린 경우가 많습니다. 수백억짜리 복합센터를 지으려면 당연히 전문가 위원회나 자문이 필요합니다. 한해 집행 예산이 조 단위인 지자체의 규모를 생각하면 브레인이 생각보다 많이 필요합니다. 그 브레인을 공급하는 역할을 지금은 지방 소재 대학이 맡고 있습니다. 지방 대학은 지자체의 '뇌'인거죠.


며칠 전 2021학년도 정시 모집 경쟁률을 종합한 기사가 나갔습니다. 대학들 힘든 건 모두 아는 내용이라 어떤 결과가 나올까 싶었지만, 도표로 만드니 확실했습니다. 서울과 먼 순서대로, 영남과 호남권은 붕괴 수순입니다. 정시는 3곳에 지원서를 내기 때문에 3대1이 안되면 사실상 미달입니다.



서울에서 멀면 죽는다


2021학년도 정시모집 경쟁률. 출처: 중앙일보

지금 대학의 유일한 경쟁력은 서울과의 거리입니다. 지자체별로 대학 정시 경쟁률을 지도로 표시하니 한 눈에 들어옵니다. '망할 지방대는 망해야지'라고 하지만, 지역 명문이라는 광주광역시의 전남대마저 미달입니다. 전남대가 서울 근교의 어떤 대학보다 질적 수준이 떨어져서 미달일까요? 지금의 대학 지원자 감소 사태는 자연재해처럼 무차별적입니다. 이걸 구조조정이라 하는 건 쓰나미가 오는데 방파제 뒤에 앉아서 '청소중'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지역사회에서 대학은 기간시설입니다. 대학이 없어지면 뇌없는 도시가 됩니다. 작은 사업을 진행할 때도 공무원끼리 할 순 없으니 연구를 해야하고 꾸준히 정책에 자문을 줘야합니다. 그걸 누가 할까요. 아무리 작은 도시여도 규모가 큰 사업은 이뤄지고 전문성이 필요합니다. 서울대 교수가 지방 도시까지 매번 갈 순 없으니 그 지역의 학자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서울에서는 이런 소식을 다른 나라 얘기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지역 대학 소멸은 서울권 대학원 붕괴와도 연결돼있습니다. 지난해 서울대 공과계열 대학원 경쟁률은 0.87대 1이었습니다. 벌써 4년째입니다. 서울대 공대가 이러니 그 외에 대학은 말할 것도 없고, 인문계는 더 심각하죠. 대학원생은 학생이면서 연구자입니다. 현장에선 연구 수행 자체가 어려워졌다는 얘기가 나온지 오래입니다.


왜 서울권 대학원이 이렇게 빨리 무너질까요. 대학원생은 기본적으로 교수가 되려는 사람입니다. 교수가 되려면 자리가 있어야 하는데, 전국의 많은 대학이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교수가 되면서 서울에서 배운 지식을 지역에 전하는 역할도 하고요. 그런데 지금은 지역 대학이면 좋거나 나쁘거나 무관하게 모두 빈사 상태라 사정이 나은 대학도 사람 뽑는걸 주저합니다. 당연히 갈 곳이 없으니 지원자도 사라지는거죠.


지역 대학의 위기가 서울권 대학원의 붕괴로 연결되는 셈입니다. 서울권 대학의 정원 절대 사수와 정원 감축을 시장에 오롯이 맡긴 결과가 대학원 붕괴로 돌아온 겁니다.



학생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 서울권 대학


급격한 인구 감소는 현실인 만큼 대학은 정리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방식은 더 진지하게 얘기해야 합니다. 모든 지방대를 기안84 웹툰에 나오는 대학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은연 중에 '살릴 대학은 남겨두고'라고 조건을 붙입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서울이랑 멀면 무조건 죽는 상황입니다. 일단 지역 내에서 몇 대학이라도 살 조건은 만들어야 합니다.


매년 서울권 주요 대학은 4000명 내외 신입생을 뽑습니다. 중앙대나 경희대는 5000명이 넘습니다. 미국의 하버드나 예일대는 신입생이 1500명 정도죠. 주요 대학이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신입생을 뽑는 곳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서울에 이정도 규모의 블랙홀을 남겨두고 지방에 양질의 대학이 살아남길 기대할 순 없습니다.


지금 대학은 스테로이드 맞은 보디빌더처럼 계속 몸집을 키우는데 목숨을 겁니다. 가격(P)이 10년째 동결이기 때문이죠. P가 고정이니 양(Q)를 늘릴 수 밖에 없습니다. 2016년 기준 한국의 대학생 1명에 정부가 쓰는 돈은 1만486달러입니다. 초등학생한테는 1만1029달러를 씁니다. 싸구려 교육을 파는 박리다매 경쟁이 벌어지니 학생 수 감소에 곡소리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대학의 질서 있는 정리를 위해선 서울권 정원을 줄여야 합니다. 대신 등록금 인상을 유인으로 제공해야 합니다. 여기에 매칭해서 국가장학금을 투입을 늘려서 저소득층이 진학할 길은 열어줘야 하고요. 지금의 학부생 양산형 대학이 아니라 그렇게 바라 마지 않던 대학원 중심의 연구대학으로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서울을 어느정도 묶어 둬야 지역 대학이 최소한 지역 학생들이라도 데려갈 경쟁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솔직히 회의적입니다.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서울권 대학을 줄이는 걸 누가 반기겠습니까. 지난 달부터 3주기 대학기본역량진단을 시작했는데 결국 ‘알아서 감축’입니다. 정부는 권역별로 묶어서 평가하니까 서울권도 지원 제한을 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수도권'으로 묶어서 애먼 경기도 대학들만 피해 볼 것 같네요. 결국 서울 거리 비례 구조조정으로 갈 것 같습니다.


한 쪽에선 지방분권을 외치고 한 손으론 뇌없는 도시를 방치하고 있습니다. '서울은 만원'이라고 외치면서도 이런 건 딱히 손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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