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과 벽이 만나면

-노먼 블레인과 배리 이건

by 초생달

1988년 방영된 <환상특급(The Twilight Zone)>의 ‘The Call’에는 혼자서 살아가는 남자 노먼 블레인이 등장한다. 혼자 살아가는 그의 곁 어디에도 친구가 없다. 그가 이리저리 떠들어대도 직장 동료는 그를 성가신 존재로만 여긴다. 하루는 TV에서 앨범 광고를 보고 전화로 주문하고자 연락을 해본다. 저녁 7시 즈음. 번호를 잘못 눌렀는지 다른 데로 연결이 되는데, 한 여자가 전화를 받는다. ‘메리 앤’이라 자신을 소개하는 여자와 노먼은 몇 시간이나 대화를 나눈다. 다음 날 저녁 7시에 전화해달라는 메리 앤. 그는 매일 저녁 7시를 기다리고, 실제로 만나고 싶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대로 충분하지 않냐며 그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는 메리 앤. 노먼은 실망한다. 하지만 동료 리처드의 제안으로 상대방의 위치를 알아내는 방법을 알게 되고, 그곳을 찾아간다. 그곳은 미술관이다. 미술관 어디를 찾아봐도 전화 상대를 찾을 수는 없다. 전시회장 한편에 마련된 전화로 연락을 해보니 한 여자 동상 앞에 놓인 전화기가 울린다. 그리고 미술관 직원에게 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 동상은 작가가 자신을 표현한 것으로 이름이 ‘메리 앤’이었다고.


시간이 영원히 멈춰진 여자 동상과 사랑에 빠진 노먼 블레인은 ‘환상 특급’이라는 제목에 걸맞은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사실 노먼이라는 사내가 메리 앤에 호감을 느끼게 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저 대화를 나눈 것이 전부이니까. 몇 시간이고 대화 나눌 상대를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노먼은 벅찬 감동을 느꼈던 게 아닐까. 대화를 나누며 메리 앤 역시 그에게 고백한다. 오랜 시간 혼자서 외로웠노라고, 당신과 대화 나눌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고. 뒤늦게 미술관 직원이 그에게 메리 앤에 대한 사연을 들려준다. 오랜 시간 남편에게 학대를 당하던 그 작가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그의 뛰어난 작품을 더는 볼 수 없어 안타깝다고 말이다.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처음 독립해 살던 때,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절실히 깨달았다. 창문을 닫고서 밥을 먹던 어느 겨울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가빠졌다. 마치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을 느낀 나는 얼른 창문을 열어 찬 바람을 한껏 들이마셨다. 그걸로 부족해 밖으로 나가 어둠 속을 한참이나 걸었다. 난 이토록 외로웠구나, 혼자서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구나 느꼈던 것 같다. 그러고도 나는 줄곧 혼자서 살아왔고 아직도 가끔은 그런 일을 겪는다.


나이를 몇 살 먹고 나서는 누구나 외로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황 장애를 겪은 내 친구도, 사무실 동료들도, 선배도,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 우리는 누구나 외로운 존재라는 걸, 누구나 밤하늘에 박힌 별들처럼 간신히 걸린 채 살아간다는 걸 알고 나니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한결 따뜻해졌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에는 수많은 누나에 둘러싸인 사내 배리 이건이 등장한다. 평생 누나들의 등쌀에 시달린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쉽게 꺼내지 못하고 결국은 신문에 적힌 전화번호를 누른다. 남성들을 위한 ‘음란 전화’였는데, 엉뚱하게도 배리는 그곳에다 자신의 외로움을 털어놓으려 한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 여성이 원하는 것은 오직 배리의 돈이었으니. 배리는 결국 사랑하는 여자와의 로맨스를 완성하게 되지만, 그게 그를 구원한 것은 아니다. 그를 구원한 것은 어쨌든, 용기였다. 용기를 내 여자에게 다가가고,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그의 반쪽을 찾는다. 환상특급 속 노먼 블레인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용기를 내 메리 앤과 함께하기로, 그녀와 같은 존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 용기가 그의 삶을 구원한다.


내게 필요한 용기라는 건 어떤 것일까. 평생 내가 머물던 원 밖으로 손을 뻗어 다른 세계와 만나는 일일까, 아니면 내가 속한 원 안으로 누군가를 끌어들이는 일일까. 벽과 벽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벽과 벽 사이에는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내가 앉아 글을 쓰는 이 자리는 한결 따뜻해진다. 손을 뻗으면 마치 그 새로운 세계가 느껴지듯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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