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을수록 제일 선명하게 떠오르는 말이 하나 있다. 고 신해철이 생전에 했던 말, 태어난 이상 더 이상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항상 무언가를 이루고 싶고, 성장해야 하고, 그렇게 해야 인간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던 내게 그 말은 무거운 경종이 됐다.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비로소 내 마음은 구원을 얻은 것 같았다.
물론 그것만으로 모든 고민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구원은 생각보다 가깝지 않았다. 아직 살아남은 내 고민거리는 소심함이다. 걱정하고 떨고 불안해하는 마음이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위해 누구를 만날 때에도 수백 번은 고민하고 떨다가 일을 그르치고는 한다. 열아홉 때는 그토록 원하는 대학 실기시험을 그르쳤다. 어려운 주제는 아니었고, 그저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썼다면 됐겠으나 내 손은 연실 떨고 있었다. 펜을 쥔 손이 그리는 글자는 엉망진창이었고, 난 결국 원하지 않는 대학에 진학했다. 사회에 진출해서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중요한 발표나 PT 때마다 내 심장은 크게 요동쳤고, 불안감은 몸에 그대로 새겨져 표현됐다.
그러니까, 지금 내 삶은 내 소심함과 불안함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이것이 없었더라면, 적었더라면 내 삶은 지금과 얼마나 달랐을까. 가끔 그런 상상을 한다. 꼭 해야 할 일을 완수했다면, 내 인생에서 만난 그 많은 실패 중 한 가지만 만회할 수 있다면. 물론 부질없는 일이다. 이미 내 손을 떠나간 일은 다시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 날 동정하거나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설령 동정해준다고 한들 내 삶이 더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삶은 매번 경쟁을 부추긴다. 누군가와 싸우고 싶지도, 결투하고 싶지도 않다. 모두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지만 그런 마음으로 해낼 수 있는 업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매번 누구보다 나아 보여야 하고, 더 훌륭한 사람인 척 흉내 내야 하며, 마치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실제로 훌륭한 사람일 필요는 없었다. 흉내만 제대로 내, 티가 안 나게 하는 것도 업무 능력이야. 나를 관통했던 사회 선배들이 해준 조언이다.
신해철 형은 내게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사회는 내게 요구한다. 사는 동안 계속 증명해야 한다고, 네가 왜 남들보다 나은 사람인지 보여줘야 한다고. 절대평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상대평가 같은 일들이 많다. 나만 잘하면 되는 일은 진행하다 보면 어느새 누구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일로 둔갑한다. 최소한 다른 재단 책자보단 더 잘 만들어야죠. 이 글보다 더 나아야죠. 다른 기관 작품보다 뒤떨어지면 안 돼요.
고결하게 살아가기란 얼마나 힘든가. 일상은 내내 포탄 냄새 가득한 전장이다. 고결한 삶을 꿈꾸는 나는 언제나 매일 아침 기관총과 폭탄을 짊어진 마음가짐으로 업무에 나선다. 중간만 하자. 어느새 내 목표는 그걸로 바뀌었다. 너무 못하지만 않으면 돼. 중간만 하면 내 인생은 무난해진다. 그 무난한 감각만이 내게는 유일한 위로다. 악다구니 써가며 고지에 오르면 힐끗 주변을 살펴본다. 날 엿본 사람은 없었겠지? 그렇게 눈에 띄지 않은 날은 기분이 좋다. 퇴근하는 날이면 익숙한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