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이야기는 오래간다
몇 년 전부턴가 한국소설을 읽는 독자 사이에서 신예작가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렸다. 재능이 뛰어난 작가들이 등장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줄곧 그래왔으나, 이번 반응은 그전과는 또 달랐다. 정말 좋은 소설을 쓰는 작가, 요즘 시대에 잘 맞는 작가 등등 극찬을 별 어려움 없이 볼 수 있었다. 동성애를 테마로 쓴다고 했는데 그게 특별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동성애 테마가 그전에 없었던 것도 아니고 영화나 다른 문화에서 1990년대 이후 수도 없이 다루었던 소재이니까. 거기에 ‘오토 픽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인의 체험을 있는 그대로 서술한 소설이라는 거다. 이것 또한 특별한 사건은 아니다. 본래 작가들은 본인의 체험을 ‘허구’와 섞되, 그걸 상대방이 알아볼 수 없게 만드는 데 주력한다. 특정 누군가에 대한 묘사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서술하면 그 대상에 피해가 된다는 우려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허구와 현실이 뒤섞인 구성이 소설의 매력이라 느끼기도 했다.
반면 리얼리즘 소설 차원을 넘어 아예 있는 그대로 사실을 전달하려는 작가들도 있다. 이 신예작가는 자신이 경험했거나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소설에 옮겨 적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동의를 받지 않아 문제가 됐다. 논란 끝에 작가는 사과했고 출판사는 책을 판매 중지 처분했다. 하지만 완전한 사과도 아니었고 완전한 처분도 아니었다. 신예작가는 트위터에만 사과문을 올린 뒤 인스타그램 계정은 운영을 중지하고 그냥 사라져 버렸다. 본인의 책을 홍보할 때와는 딴판이다. 이미 판매중지를 막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 출판사와 작가 측은 이 의견을 묵살했던 모양이다. 상대방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받아들이지 않은 대가를 앞으로 꽤 오랜 기간 치르게 될 것이다. 대중은 좋은 이야기는 쉽게 잊되 나쁜 이야기는 잘 잊지 않는다. 십 년 전에 음주운전을 했다가 사고하고 복귀한 연예인에게는 아직도 ‘음주운전 연예인’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글쓰기의 윤리를 벗어난 호기심과 욕망
중고등학교 때 글 쓰는 매력에 빠지면서 여러 백일장에 참여했고, 그중 몇 곳에서는 상을 받았다. 그중 아버지에 대한 산문도 있었는데, 아버지와 나의 불화를 다루었다. 불화에만 집중한 것은 아니고 애증과 가족애를 적절히 뒤섞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 생각은 달랐다. 우연히 내 책상 서재에 꽂힌 작품집을 본 아버지는 그날 술이 잔뜩 취한 채 내 방에 들어왔다. 서운함을 토로하는 아버지의 눈에는 사랑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나머지 가족도 이 사실을 알게 됐고 이후 나는 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허락도 받지 않고 글로 쓰느냐는 핀잔을 들었다.
그 이후부터 본능적으로 내 주변의 이야기를 쓸 때에는 주저하고 조심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난 몇 번의 실수를 더 했다. 어떤 친구의 이야기를 지나치게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써 블로그에 올렸고, 그걸 본 친구는 내게 그 문제를 지적했다. 난 결국 블로그 포스트를 지웠지만 그 이후 그 친구와는 다시 연락하고 지내지 못한다. 몇 번의 자각과 실수, 사과를 반복하면서 지금 여기까지 왔다.
작가 지망생은 글쓰기 수업에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때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자신의 치부도 거침없이 드러낼 줄 알아야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작가 겸 교수들의 말이 내게는 하나의 기준점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런 과정에서 내 치부를 드러내면서 남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데에 너무 무감각했다.
신예작가의 최근 사태를 접하고 나니 이게 비단 해당 작가만의 문제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많은 작가들이 아직도 그런 유혹에 시달린다. 때때로 내 주변의 이야기는 픽션보다 실감 나고 흥미로우며 자극적이다. 호기심과 욕망이 글쓰기의 윤리를 극복하고 나면 더는 거칠 것이 없다. 일부 비평가와 작가들은 이런 일을 감싸는 데 익숙하다. 본인들이 그렇게 배우고 써왔으니 말이다.
너와 내가 함께 머무는 ‘이 세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쓰든 편집해서 쓰든 어떻든, 핵심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임을 깨닫는다. 나는 너와 내가 함께 머무는 ‘이 세계’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이 세계의 너를 의식해야 한다. 글쓰기의 윤리성을 지키면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 수 있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게 안 해봤고 못하겠다면 앞으로 그렇게 하도록 연습하고 노력하면 된다. 잘난 내 글 하나로 그 대상에 오른 누군가가 아주 오랜 기간 고통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잊는다면, 그건 내가 이미 브레이크 밟을 타이밍을 놓친 채 폭주하는 자동차가 됐다는 뜻이다. 도로교통법을 준수하지 않고 주변 차량 상황을 의식하지 않고 달리는 자동차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자동차 레이싱 경기장에서도 규칙과 제한은 존재한다. 그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지키지 않는다면 나는 더 이상 레이싱 경기장에 오를 자격이 없다.
문제가 된 신예작가는 안전장치를 부수고 경기에 나서 상까지 탔지만, 뒤늦은 제보로 처벌을 받게 됐다. 사람들의 기억은 꽤 오래간다. 아마 한국소설 독자들은 몇 년 후에도 그 신예작가의 이름을 보는 즉시 2020년 사건을 떠올릴 것이다.
오토 픽션이 완성되려면 오토 픽션 내에 존재하는 요소들이 모두 검증을 받아야 한다. 검증되지 않은 재료는 불안과 공포를 안긴다. 음식이 그렇고 건물이 그렇고 수없이 많은 문화공연이 그렇듯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검증을 거치지 않은 재료들은 소설 내부를 썩게 만든다. 겉만 화려하니 ‘빛 좋은 개살구’라는 전형적인 표현은 이럴 때 쓰면 제격이다.
소설에는 대개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에게는 모두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다. 작가라면 응당 그 인물들의 요청에 귀 기울인다. 너는 무엇을 꿈꾸니, 어떤 이야기를 하는 건 조심스럽니, 이렇게 다루는 게 좋겠니. 작가들은 소설을 쓰는 내내 등장인물과 대화하며 조절하고 타협한다. 인물들이 원하지 않는 이야기를 쓴다면? 그건 정말 불행한 글이 되지 않을까. 내부 구성원들이 전혀 행복해하지 않는 세계라니. 작가는 ‘하나의 소설’을 짓고 만든 군주와도 같다. 주민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군주로 남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