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 제미나이, 클로드 등 수많은 AI 프로그램이 대중화되며 직장 업무가 한결 순조로워졌다. 책을 만드는 것만 해도 기획부터 원고 작업, 수정과 윤문 등 대부분의 작업에서 도움을 받는다. 현장 취재야 사람이 직접 나가지만 녹취만 해놓으면 AI가 원고를 매끄럽게 만들어준다. 물론 아예 다 맡기는 건 아니다. 질문이나 요청을 보내는 사람이 어떤 방향성과 내용을 원하는지에 따라 모든 게 바뀌기 마련이다.
AI가 없던 시절에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그걸 기획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모든 과정을 혼자서 해내야 했다. 반면 AI는 인간의 든든한 조력자다. 인간에 반항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인간의 뜻이 최대한 잘 구현되도록 돕는다. 이렇다 보니 기획과 작문 등 모든 면에서 AI의 능력을 경계하는 일이 늘고 있다. 입찰 프레젠테이션 현장에서 심사위원들은 제안서가 AI로 만든 것인지 인간이 직접 만든 것인지 따진다. 신춘문예나 문학상에서는 아예 AI 작품을 금지하며 논란을 사전에 차단하려 한다.
AI 덕에 작업이 편해진 게 꼭 나쁘지만은 않다. 매일 야근에 시달리던 직장인들이 AI의 도움으로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예컨대 AI로 제안서를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아이디어를 가진 인간은 그걸 기존 방식과 차별화된 기획으로 선보이고 싶어 한다. 그럴 때면 자신의 방향과 바람을 AI에게 구체적으로 요청하면 된다. “이 기획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구현해줘.” 구체적일수록 더 알맞은 제안서가 나온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낸 제안서를 인간이 만들었다고 보는 게 맞을까.
머릿속 아이디어를 구체적인 기획으로, 그 기획을 설득력 있는 스토리텔링으로, 그 스토리텔링을 실제 존재하는 하나의 책자로 만드는 데에는 많은 고민과 힘이 필요하다. 그 과정은 지루하고 힘들다. 인생에는 기적이나 마법이 잘 일어나지 않으니까. 스스로 그걸 헤쳐나가지 않으면 답을 찾을 수 없고 성장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때론 그 과정을 삭제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AI의 도움을 받아 그 과정을 생략하면 업무는 한결 편해진다.
내 경우에는 업무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그 기획이나 글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쨌든 잘 해결되면 모두에게 좋은 거 아냐?’라는 생각과 ‘내가 내 감각으로 직접 돌파해야 한다’라는 순정이 머릿속에서 충돌한다. 난 내 힘으로 잘하고 싶고, 부족한 건 메워가며 성장하고 싶으니까. 어릴 때부터 내가 꿈꾸던 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사람이지, 이렇든 저렇든 결과만 좋은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다시 한번 내 삶, 일상, 시간을 생각해보는 일요일 밤이다. 귀찮고 힘든 걸 배제하면 곧 죽은 송장이 되는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