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늘>을 처음 들었던 날

by 초생달

남이 뭐라고 하든 말든 자신의 감성(그런데 청승을 곁들인)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남을 사랑하느냐고, 왜 날 떠났느냐고. 음악 전문가들은 흔히 ‘자신이 울지 않고도 남을 울려야 진정한 일류’라고 하는데 이 가수는 그런 건 신경도 안 쓴다. 보컬만 그런 게 아니다. 비애와 초조함, 때로는 초연함까지 품어내는 노랫말은 다분히 문학적이다. 여러 번 고민하며 고쳐 쓴 흔적이 역력하다. 구조적으로 탄탄하다. 그래도 매력은 역시 보컬의 힘에 있으리라. 평론가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끝까지 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극단의 감성 덕에 그는 대중뿐 아니라 평론가들의 마음도 얻어냈다. 자신만의 오롯한 세계를 지어놓고선 예민하고 남다른 감수성을 지닌 팬들만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그 다리를 건너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청승이지만, 건너온 사람들에게 이건 늪이다. 이소라의 음악 이야기다.


이소라는 솔로 가수로 잘 알려져 있으나 20대 초중반 무렵 이소라는 ‘낯선사람들’이란 재즈보컬 그룹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듯하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야생마였다. 자제나 조절이란 단어는 내 국어사전에는 없다고 말하는 듯한, 넘치는 힘을 주체 못하는 게 아니라 자제할 생각도 딱히 없는 듯한 보컬. 재즈보컬 그룹 속 유독 눈에 띄는 로커. 낯선사람들 1집 수록곡 <왜 늘>을 들어보면 특히 더 잘 알 수 있다. 정규앨범에 수록된 원곡도 좋지만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라이브 버전’을 들어보면 더 좋다.


이 곡을 만든 고찬용은 내 십 대 시절 영웅이었다. 제2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대상곡 <거리풍경>을 라디오에서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중학교 수업이 끝나면 나는 혼자 터벅터벅 축 처진 어깨를 벗 삼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차디찬 마룻바닥에 뺨을 갖다 대고선 검정색 고물 라디오를 껴안은 채 한참이나 음악을 들었더랬다. 그러다가 우연히 스치듯 <거리풍경>을 듣고선 내 동공은 급격히 확대됐다. 재즈의 자유로운 그루브, 현란한 기타 연주, 감각적인 리듬. 아련함이나 비애를 뽕짝 멜로디에 실어 보내던 기존 한국 가요계에서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곡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고찬용이라는 세 글자와 사랑에 빠졌고, 자연스레 낯선사람들의 음반을 샀다. 그의 노래들에는 ‘고찬용’이라는 인장이 강하게 박혀 있었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왜 늘>이다. 이 곡에서는 고찬용의 인장보다 이소라의 목소리가 곡 자체를 집어삼킨다.

이소라는 1집 활동 이후 김현철에게 발탁돼 솔로로 나갔고, 지금이야 한결 정돈된 스타일이지만 낯선사람들 시절의 이소라는 차원이 달랐다. 당시 그녀의 목소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른다. “어둠 속 그 뜨거운 숨소리”라고 하며 거칠게 내뱉는 숨소리는 어떤 성인영화의 장면보다 섹시하게 느껴졌다. “에~ 찌푸린 이런 날에 무얼 하나”라는 부분에서는 마치 듣고 있는 내가 뭐라 대답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백명석과 신진으로 추정되는) 남자 보컬들의 목소리가 이소라의 목소리에 조화롭게 얹히는 “나의 기억 버린 척 나를 멀리하면서 내가 모르게 지나쳐” 대목에서는 몸에 닭살이 돋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나는 그 목소리의 포로였다. 수백수천 번을 넘게 듣고도 질리지 않아 매일 자기 전에 카세트테이프를 감았다가 재생했다가, 다시 감기를 반복했다.


최근 이 노래에 대해 이소라와 유희열이 언급하는 영상을 봤다. <비긴 어게인>이라는 JTBC 음악 프로그램의 클립 같았다. 유희열은 신이 난 듯 <왜 늘>을 부르던 시절 이소라 목소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야기했고, 이소라는 쑥스러운 듯하면서도 한두 소절을 나직한 목소리로 불러주었다. 그 작은 목소리에도 내 몸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옆에 가만히 있다가 그 노래 안다고 말하는 윤도현의 표정은 더없이 무심해 보였다. <왜 늘>을 이야기하며 어찌 그리 무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지? <타잔> 같은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니 그렇게 놀라지 않겠다는 것일까.


<왜 늘>, 그리고 이 노래 속 이소라의 목소리는 십 대 시절 내 영혼을 사로잡은 몇 안 되는 곡 중 하나다. 자로 잰 듯 딱딱 맞는 구성과 스타일이 반드시 아름다운 것은 아님을, 때로는 찢어진 목소리나 삑사리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내게 알려준 순간이었다. 그건 단지 음악적 취향의 변화로 끝나지 않았다. 반듯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넘치는 것이 모자란 것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그 깨달음은 음악 너머로 번져서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그러니까, 이 노래를 만난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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