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한 순간
어릴 때부터 청춘스타들이 나오는 드라마를 좋아했다. 주인공 직업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의사든, 변호사든, 광고인이든 결국 그들의 연애가 핵심이었으니까. 출연 배우들은 하나같이 잘생기고 예뻤다. 내가 사랑하던 일본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특히 그랬다. 오다 유지, 스즈키 호나미, 기무라 타쿠야, 마츠 다카코, 야마구치 토모코. 그들의 이야기를 보며 ‘연애는 멋지고 예뻐야만 가능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이런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연애를 할 수 없어. 어쩌면 내 인생은 B급, C급, 스페어타이어 같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 말이다. 내 인생은 그들의 대본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실수를 저질러도 쉽게 용서를 받는다. 다시 기회를 얻고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뤄낸다. 원하지 않아도 주변에는 언제나 그를 짝사랑하는 이성이 존재한다. 내게는 기적 같기만 한 일들이 브라운관 속에서는 ‘당연한 일상’인 양 매번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진다.
그러다 설 연휴 기간에 만난 펑크록 밴드 ‘더 블루 하츠’의 <Linda Linda>는 내 생각을 가뿐하게 박살 냈다. 가족들과 함께하기에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설 연휴, 본가의 내 방에서 이런저런 노래를 살펴 듣다가 유튜브 알고리즘이 뜬금없이 이 낡은 노래를 내 앞에 던져주었다. 1987년 등장한 그들의 대표곡 <Linda Linda>는 우회하지 않는다. 보컬의 목소리도, 노랫말도, 연주도 모두 직설적이고 솔직하다.
가장 먼저 꽂히는 건 ‘내일 따위는 없는 것’처럼 화끈하게 질러대는 보컬이다. 그다음으로는 악기가 부서질 듯 쳐대는 연주가 들어온다. 다들 “오늘 이 무대에서 장렬하게 산화하고 말리라”라는 각오라도 한 것 같다. 유튜브로 공연 영상을 살펴보면 특히 필사의 결기가 느껴진다. 조금은 귀엽게 느껴지는 결기 말이다. 그래도 가장 좋았던 것은 역시 노랫말이다.
“시궁창 쥐처럼 아름다워지고 싶어/사진에는 찍히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으니까”
도입부의 ‘시궁창 쥐처럼 아름다워지고 싶어’라는 노랫말이 내게는 꽤 충격이었다. 김종삼 시인의 시 한 구절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 우아한 노랫말을 처음 듣고 머릿속으로 내내 쥐의 모습을 그려봤다. 혐오스럽고 피하고 싶었던 존재. 등굣길, 하굣길 좁은 골목을 지날 때면 축축한 구석 한 곳에 죽어 있던 쥐 사체를 발견하고는 했다. 잔뜩 눌린 그 녀석을 마주할 때면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는 했다. 그러고는 손발을 벌벌 떨며 조심스럽게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다.
시계태엽을 감아 그때로 돌아가볼까. 그 녀석에게는 어떤 삶이 있었을까. 어떤 억울한 사연이 있었을까. ‘인간의 판단으로’ 혐오의 대상이 돼버린 쥐들의 처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골목 구석에 짓이겨져 있던 그 녀석의 처지가 스스로를 B급이니 스페어타이어니 여기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의 시선 안에서 보잘것없는 존재로 분류된 삶. 내가 외면했던 그 녀석들의 삶도, 그리고 그걸 지켜보며 애써 고개를 돌리던 나의 삶도 모두 아름답다는 사실을 ‘더 블루 하츠’는 이미 알고 있었다.
더 블루 하츠는 “사진에 찍히지 않는” 아름다움이 자신들에게도, 그리고 청자에게도 존재한다고 믿는다. 멋지거나 근사해 보이지 않아도 이 삶을, 그리고 누군가를 온 마음 다해 사랑해보자고 말하는 거다.
이 시끌벅적한 노래를 듣고 나면 이상하게도 울컥한다. 우린 누구나 아름답다는 위로, 그러니 함께 온 힘 다해 전진하자는 선언처럼 들렸다. 더 블루 하츠의 그 외침들이 내 마음에 총천연색 무지개로 뿌리 내린 어느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