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한두 시 무렵 일을 마친 후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창문을 열면 택시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차다. 창문을 닫으려는데 밤하늘 어딘가 햇빛이 비치면 반짝이는 모래 같은 별들이 눈에 띈다. 내게 맞춰 달리는 별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지, 생각할 때마다 두 눈 앞에서 별들이 반짝인다. 별들이 전해주는 온기가 나를 감싸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러나 내게 온기를 전해주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인생의 방향을 제시한 한마디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때때로 내 인생의 방향을 정해주기도 한다.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던 나는 그저 소설 읽고 쓰는 것이 좋은 작가 지망생이었다.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한 것은 그런 점에서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긋지긋한 과학 이론과 숫자 대신 글자와 행간, 상징과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내 마음에 더 와닿았다.
대학교 2학년 무렵 시 담당 교수는 시 한 편씩 써서 내라고 했고, 나는 전날까지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초조한 마음에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문득 물이 차오르는 변기 이미지가 떠올랐다. 당시 불편했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마치 변기 속 물 같다고 느꼈던 듯하다. 차오르다가 이내 수그러들고, 다시 넘치기 직전까지 차오르는 위태로운 관계. 고장이라도 나면 어떡하나 조마조마했던 시절. 그때의 감정을 늦은 밤까지 시로 썼고, 다음 날 시 담당 교수는 내게 좋은 점수를 줬다. 네 시가 오늘 제출한 작품 중 제일 좋구나. 내 힘으로 인정받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내가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회의로 가득했다. 문예창작학과에는 글 좀 쓴다는 녀석들이 너무 많았고, 그들의 창의적이고 기발한 생각들에 겁먹은 상태였다. 그때 시 담당 교수가 수업시간에 내게 말해준 한마디는 마치 한낮의 따뜻한 햇살처럼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인정받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내가 무언가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은 이토록 행복한 일이구나, 라고 느꼈다. 그 한마디가 이후 내 인생을 바꾸었다.
뜻밖의 구원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 나폴레옹 제과점 본점 맞은 편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커피가게 ‘네임드 에스프레소’(이하 네임드)는 밝은 느낌의 공간은 아니다. 약간은 어두침침하며 무심한 듯 시크하다. 그래서 혼자 오는 손님들이 많고, 그들은 대게 주인이 내려주는 핸드드립 커피나 에스프레소 베이스의 음료를 마시며 말없이 시간을 보낸다. 오래 머문다고 주인이 눈치를 주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주인은 손님들을 불편하지 않게 하기 위해 조용히 자신의 공간에 머물기 일쑤니까.
인스타그램을 통해 우연히 이 카페의 존재를 알게 됐고, 마침 일을 쉬고 있던 터라 호기심에 네임드를 방문했다. 네임드는 무심한 듯 카운터에 놓인 메뉴판만 봐도 그 성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라떼나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시려고 해도 원두 종류와 그라인더의 날, 우유 종류를 선택해야 한다. 라떼 한잔이요, 라고 말하면 그만인 프랜차이즈와는 다르다. 원하는 풍미의 원두와 그 맛을 이끌어낼 수 있는 그라인더의 날과 우유를 고르고 나면 네임드를 혼자 이끌어가는 주인은 무심한 듯 조용히 커피를 제조하기 시작한다. 커피 외에 초코가 송송 박힌 쿠키와 휘낭시에 역시 별미로 손꼽을 만하다. 디저트류 모두 커피와 마찬가지로 주인이 직접 만들어낸다. 혼자서 커피 로스팅과 커피 및 디저트 제조, 카페 운영까지 하려면 꽤 많은 힘이 필요할 듯하다. 그래서인지 네임드의 주인은 언제나 묵묵히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커피 다 됐습니다. 나직한 목소리로 주인이 날 부르면 커피잔을 끌어다 풍부한 향을 느껴본다. 네임드에서 시나몬 맛과 향이 인상적인 코스타리카 라 미니야 원두로 내린 핸드드립 커피를 처음 마셨다. 지난 여름이었다. 이색적인 맛과 향을 진하고 깊게 잘 살려낸 커피 한 잔이 내 마음에 오래 남아 있었다. 그때부터 네임드의 단골이라 자처하며 들락거렸다.
때때로 사람들은 어처구니없이 생뚱맞은 곳에서 위안을 찾기도 한다. 거리를 지나가다 우연히 본 낙서의 한 구절, 늦은 새벽 근무 후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창밖으로 바라본 별빛들에서 안정감을 찾는다. 그 무언가에서 날 이해하는 세계, 날 이해하려 애쓰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찾아낸다. 어쩌면 그것은 간절한 바람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받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대학 시절 시 담당 교수의 한마디가 내 마음을 흔들었던 것도 그 때문은 아닐까. 두 눈 앞에 온통 뿌연 안개로 가득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이로 선명하게 비치는 빛이 있었다. 그 빛의 정체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따뜻한 예감을 주는 것만은 분명했다.
최근 내게 그 따뜻한 기운을 주는 것은 네임드의 커피였다. 네임드에서는 정성스럽게 로스팅한 원두를 기반으로 물의 온도와 그라인더의 날, 우유의 종류 등을 세심하고 꼼꼼하게 따져가며 내려준다. 무엇 하나 허투루 하는 것이 없다.
그렇게 우리 앞에 커피 한 잔이 당도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남들과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이는 한 잔. 하지만 그 안에는 사람들의 취향과 생각을 담아내려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그 간절함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나 말고도 단골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커피 관계자 및 매니아들 사이에서 자주 네임드의 이름이 거론되는 걸 보면, 그 간절함은 꽤 큰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온종일 글자와 원고, 말도 안 되는 요청에 파묻혀 지내다 퇴근하는 길이면 문득 네임드의 커피 한 잔이 간절하게 떠오른다. 고민이 많을 때도 그랬다. 그 공간 안에서 커피 한 잔을 받아들고 있으면 더는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네임드는 내 보폭에 맞춰 함께 걷고 달려주는 별들처럼 따뜻하다. 무심한 듯 보이나 세심하고 깊은 신뢰가 느껴진다.
그 커피 한 잔이 지금 바로 내 앞에 있다. 그리고 당신 앞에도. 삶은 때때로 뜻밖의 일들에서 구원받기도 하는 법이다. 이토록 세심한 정성이 깃든 커피 한 잔 역시 당신에게 구원이 될 수 있다. 어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