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내 어린 시절은 행복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마찬가지였으니. 존재감이 없던 나는 생물과는 거의 어울리지 못한 대신 FM 라디오나 카세트테이프, 책, 영화 비디오테이프 등 무생물과 더 각별했다. 소수의 친구가 있었고, 연애를 아예 안 해본 것도 아니지만 그보단 혼자서 지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렇다고 혼자서 좋았다거나 즐겼다는 건 아니다. 생각이 너무 많아 생각이 없어 보였던 사춘기 때부터 나는 공동체, 커뮤니티 같은 단어를 흠모했다. 하지만 사람이 셋 이상만 모이면 몸이 얼어붙었던 내게 공동체는 너무 높게 솟은 벽 같았다.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세워진 높고 강한 벽을 대체 어떻게 뛰어넘는다는 말인가. 그건 불가능해 보였다. 거기에다 중학교 때는 주변 아이 몇 명에게 집단 따돌림 비슷한 행위를 당하기도 했다. 내향적인 성격과 따돌림까지 더해지면서 나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일기에다 걸핏하면 죽고 싶다는 말을 쓰는 통에 어머니가 학교로 불려가기도 했다. 담임은 학생을 위로하기보다는 주변에 통보하길 즐겼다.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그는 부모나 다른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의 담당 과목은 윤리였다.
그래도 나빴던 것만은 아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펜팔이다. 고등학생 시절 3년은 물론 대학교 1~2학년, 그리고 군 복무 시절까지 계속됐던 펜팔 상대는 부산에 살던 동갑내기였다. PC 통신을 통해 펜팔 상대를 구했던가. 시작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꽤 오랫동안 손편지를 주고받으며 이야기 나눴다. 글을 쓰는 게 좋았던 나는 내가 읽은 책과 습작을 보여주었고, 친구는 내 시를 학교 국어 선생님에게 보여줬다면서 몇 가지 조언을 들려주었다. 시인으로 활동했다는 그 선생님의 시집을 몇 권 보내주기도 했다. 지옥 같았던 시간 동안 그 교감이 없었다면? 끔찍하다. 부경대학교에 입학했던 친구는 학교를 다니면서 재수를 준비했고, 결국 부산대학교에 다시 들어갔다. 군 시절에도 편지를 몇 번 주고받았는데, 도중에 연락이 끊겼다. 이유는 모른다. 삐쩍 마르고 시꺼멓던 내 군인 시절 사진을 보내준 게 실수였을까. 그리고 그 이후로 우리는 영영 남남이 됐다.
애당초 만나보지도 못한 펜팔 친구였으나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걸 보면 당시 내게 큰 위로가 됐던 모양이다. 그때 받은 편지의 상당수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이사를 할 때에도 버리지 않았다. 악필인 나에 비해 글씨를 예쁘게 썼던 그 친구는 나와 달리 이공계였고 결국 전공도 수학 계열로 갔다. 다른 점이 많았지만 힘든 시절을 함께 관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마음을 나누었다.
1년에 몇 번쯤 그 편지들을 다시 꺼내서 읽는다. 별 내용이 없는데도 꾹꾹 누르고 담아 보낸 편지 읽는 일이 마냥 좋다. 생각해보면 그 친구가 내 인생의 첫 짝사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설렘이 내 인생에서 다시 찾아오는 일은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