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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by Jacquesenid

난 모순된 사람이다. 공동체, ‘우리’라는 말에 마음이 끌리지만 정작 공동체 안에 들어가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우리’라기보다 ‘우리와 나’가 된다. 침묵을 좋아하지만 싫어한다. 대중교통이나 거리, 카페, 사무실 어디서든 시끄러운 걸 싫어하지만 퇴근 후 집에서 맞이하는 침묵은 두렵다. 그래서 집에 오면 항상 무언가를 틀어놓는다. 라디오도 좋고, 익숙한 영화나 시트콤도 좋다.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마음은 안정을 찾는다.



무언가 읽고 쓰는 걸 좋아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언제나 책을 읽거나 스마트폰 메모장에 무언가를 기록한다. 하지만 정작 집에서는 유튜브 콘텐츠를 보거나 운동을 하는 게 전부다. 아무도 날 방해하지 않는데 혼자 머문 공간에서 항상 불안에 휩싸인다. 내 삶이 더 이상 개선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불행은 지름길로 날 찾아올 거라는 생각. 부러 걱정을 만드는 타입이랄까. 나란 사람의 정체다.



보통 일요일이면 다음 날 출근 걱정 때문에 조마조마하지만, 내일은 현충일이라 쉬니까 기분이 좀 달랐다.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먹고 청소를 한 다음 민트색 소파에 누워 마냥 쉬었다. 그러다 만날 하는 운동을 하고 홈플러스에 들렀다. 네 캔에 만 원이라는 수입 맥주를 사고 곰탕, 그릭요거트와 우유, 소면을 샀다. 소면을 삶아 어머님이 챙겨주신 양념장을 넣어 먹었고 남은 양념에는 밥 반 공기를 추가했다. 곁들인 로제 비어는 내 입속을 흔들어댔다.



꽤 괜찮은 주말이었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다. 할매가 떠올랐다. 반지하 방에서 외롭게 살다가 돌아가신 할매. 가슴 벅차게 날 사랑해주었던 사람. 할매가 돌아가신 이후 난 누구에게도 그런 사랑을 느껴보지 못했다. 할매였음을 생각한다면 당연하지만 내겐 당연해서는 안 됐다. 그래서 난 줄곧 굶주린 사람처럼 떠돌아다녔다. 거리에서 목적 없이 나뒹구는 휴지 조각처럼.



무엇이든 쌓아 올리면 역사가 될까. 기록들은 나를 얼마나 증명하고 말해줄까. 글자들이 날 쓰다듬고 보듬어줄까. 깊이 뿌리를 내리면 자라고 자라 잎과 열매가 풍성한 나무가 될까. 숲이 될까. 정답은 알 수 없지만, 오늘은 오늘뿐이고 ‘오늘의 나’는 오늘 ‘오늘의 나’밖에 없지.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를 얼마나 기억할까. 쉽게 잊지는 않을까. 어떤 방식으로든 오늘, 오늘의 나를 기록하기로 한다. 내 삶은 아직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지 않았으니까. 상당 부분을 잘못 찍거나 망쳤으나 만회할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왜 그런 영화도 있잖아. 처음에는 별론데 후반부는 괜찮은 작품. 엔딩 때문에 잔상이 오래도록 떠나지 않는 작품.



모순(矛盾)은 청나라의 일화에서 비롯된 단어라 한다. 중국 초나라의 상인이 창과 방패를 팔면서 창은 어떤 방패로도 막지 못하는 창이라 하고 방패는 어떤 창으로도 뚫지 못하는 방패라 하여, 앞뒤가 맞지 않은 말을 하였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내 삶이 모순으로 가득한 이유는 내가 창과 방패를 동시에 들고 있기 때문이지. 한 손에 든 창으로 나 스스로를 공격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방패로 그 창을 막는 형국이다. 난 항상 나 스스로와 다투느라 피곤했다. 평행선을 달리는 감정들은 언제나 대립각을 세우며 내 안을 좀먹었다. 상처뿐인 마음으로 바깥을 나서니 관계가 제대로 풀릴 리 만무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던데. 난 ‘변화’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어쩌면 난 아주 오랫동안 창과 방패의 싸움을 반복하게 될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이 다치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온전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나. 그 답을 찾기 위해 읽고 생각하고 기록한다. 이 길의 끝에서 난 웃을 수 있을까. 답은 알 수 없지만 일단 걷겠다.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니까. 어쩌면 내 휴지 조각들이 내게 무엇을 알려줄지도 모르지.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이라든가, 지금보다 약간 삐뚤빼뚤 걷는 법이라든가, 의외로 삶은 간단한 것이라는 농담을 전해줄지도 모르지.



그래, 이제 내 삶에는 농담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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