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숲

by 초생달

‘이야기’를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내 현실이 픽션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뭘 해도 나는 주인공처럼 살 수 없었다. 연애도, 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마다 이야기에 위로받았다. 거대한 서사와 플롯의 숲에서 나는 길을 헤맸다. 그 당혹스러운 미로와 사랑에 빠졌다. 플롯이 뒤죽박죽인 작품을 좋아하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난 이야기보다는 묘사와 관념에 더 집중하는 작품들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감정이입을 할 수 없었으니까. 감정을 이입해야 숲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나이를 한두 살 먹을수록 가능성은 사라져가고, 점점 시시한 사람이 되어갔다. 아니, 시시한 사람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될 거라 생각했지만, 오판이었다. 난 조금도 특별하지 않았다. 대다수의 생각을 따라서 했고, 대다수의 고통과 기쁨을 비슷하게 느꼈다. 남들이 할 수 없는 건 나도 할 수 없었다. 시시한 얼굴을 확인할수록 이야기가 싫어졌다. 그토록 사랑했던 서사와 플롯의 숲이 어둡고 낯설게 느껴졌다. 차가웠다. 결국 내 선택은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뿐이다. 나는 생각을 지우고 살았다. 회사 업무는 그런 내 생각을 도왔다. 온종일 ‘글’을 통해 남의 부귀영화에 힘쓰다 보면, 글이라는 게 초라하고 가치 없이 느껴졌다. 이토록 값싼 글이라니. 내가 싫었고, 밥벌이를 위해 쓴 글 대부분이 싫었다.

남이 쓴 이야기와도 멀어졌다. 영화, 드라마, 소설을 더 이상 보지 않았다. 잘난 사람들이 나와서 인생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댔다. 몇십억을 버는 인간들이 서민과 계급을 이야기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럴수록 더욱 고립됐다. 감정 기복이 심했다. 극도로 기뻐하다가, 극도로 누군가를 경멸했고, 그러다가 어이없는 이유로 쉽게 안정을 찾았다.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노총각 신세를 재치 있게 표현하며 영화를 리뷰하는 유튜버를 사랑했지만, 그가 연애하고 결혼하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구독을 취소했다. 난 그렇게 간사한 인간이었다. 누군가는 저렇게 구원을 받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구렁텅이에 처박혀 있는데, 숲과 벌판의 경계에서 주저하며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있는데. 가끔은 혼자서 질문하고 답을 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혼자 놀기인가. 나는 나보다 잘나지 않았으므로 열등감을 느끼지 않아도 됐다. 세상 모두가 나보다 잘나 보였다. 저 사람은 저래서 나보다 낫고, 이 사람은 이래서 나보다 낫고. 가끔은 이야기가 그리웠다. 하지만 다시 만나기 두려웠다. 편견이나 오해 없이 너와 만날 수 있을까.


일 년 반 넘게 얼굴도 본 적 없는 일본 여자와 대화한다. 나이도 다르고 사는 국가도 다르고 환경도 언어도 직업도 다르다. 소셜미디어가 아니라면 평생 만날 일 없는 사람이다. 대부분은 내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당신의 글이 좋아요. 대학교 때 최문자 교수님에게 칭찬받은 이후로 처음 듣는 말이었다.


특히 당신이 재미있게 쓴 글이 좋아요. 오래전 첫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뒤 블로그에 올린 연재 글을 보고 난 뒤 그녀가 말했다. 첫 제주도에 설렜던 나는 당시 끊임없이 메모해두었다가 매일 밤 숙소에서 글을 적고는 했다. 올레길, 바다, 동춘서커스, 여행지에서 만난 친구와 늦은 밤까지 술을 기울이던 추억. 어쩌면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은 아니었을까. 그때는 몰랐지만.


특별하진 않지만, 아무도 읽어주지 않더라도, 내 일상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에게는 의미가 있겠지. 그리고 내 글을 정성스럽게 읽어주는 그녀에게도. 그래, 글을 쓴다는 건 애초부터 전쟁이었지. 총탄처럼 쏟아지는 졸음과 화약 연기처럼 스며드는 권태를 이겨내야만 겨우 한 줄을 쓸 수 있다. 중학교 때부터, 소설을 전공했던 대학 때에도, 직장 생활 초기까지도 나는 남들에게 내 글로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쉽지 않았고 결국 나는 이렇게 혼자 남았다. 난 실패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 발버둥을 쳤지만. 그래, 하지만 뭐 그러면 또 어때. 평생 두 명을 위한 글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걸. 세상 단 하나밖에 없는 거잖아. 나와 그녀만을 위한 글. 그게 ‘이야기’가 될 수 있다면, 나는 다시 그 숲에 발을 들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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