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부터 소설을 탐독하던 내가 르포르타주 문학에 빠진 것은 직장의 영향이 컸다. 진보 성향의 책들을 만드는 출판사에 에디터로 입사했던 나는 노동 현장이나 파업, 시위 현장 등에서 몸소 뛰며 외치고, 그 이야기를 글로 써내는 르포 작가 선배들에게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사람들에게 말 거는 일조차 쉽지 않던 내게 그들은 영웅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들에게도 문제는 있었고, 부정적인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으나 그건 그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증거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내가 거기서 느낀 건 현장성이다. 책상에 앉아서 상상했던 세계와는 달랐다.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의 고민과 웃음, 눈물, 분노가 날카롭게, 때로는 차분하게 담겨 있었다. 내가 그 이야기들을 좋아했던 건 아버지가 인쇄 노동자로 오랫동안 일하셨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독한 잉크 냄새를 맡고 무거운 원단을 나르며 생활비를 버신 아버지를 다르게 보고 존경하게 된 계기가 됐다. 그런데도 달라지지 않는 환경과 삶에 분노했다.
하지만 분노보다는 돈이 더 가까웠다. 살림살이가 좋지 않았던 출판사는 점점 기울어졌고, 결국 당시 편집팀은 서너 달 분 급여와 퇴직금을 받지 못한 채 퇴사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들어간 곳은 출판 대행사였다. 정부 기관이나 기업의 소식지 및 브로셔 등을 만든다.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일을 따내서 책을 만들어내기만 하면 되니 판매 걱정은 안 해도 됐다. 하지만 도무지 정을 붙이기 힘든 어려운 내용들이 문제였다. 역사, 과학기술, 산업 환경, 음식 등 평소 관심이 없던 분야의 책자를 만드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글자를 보는 일이 점점 괴로워졌고 퇴근하고 나면 술을 마시며 가까스로 마음을 달랬다.
생소한 글자나 숫자, 도표, 학술적인 내용, 참고문헌 등에 파묻혀 지내다 퇴근하고 나면 내 책장에 꽂힌 책을 단 한 글자도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글자에 질린다는 걸 실감했다. 문예창작학과 재학 시절의 꿈은 차츰 잊혔다. 기계적으로 원고를 쓰고 진행하는 데 익숙하다는 건 어떤 면에서는 이로웠지만 어떤 면에서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내가 점차 나를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지난 시절 후회해봐야 소용없었다. 지난 시간은 어차피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차가운 과거 연인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간은 맹렬하게 앞으로만 간다.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나는 나를 잃어가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가끔 주말 밤에 책을 보거나 일기를 쓰다 보면 이야기와 플롯을 짜고, 어떤 형태의 작품을 만드는 데 내 모든 걸 바쳤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가 그리웠고 지금의 내가 더없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여기까지 온 걸까. 내 길이 이게 맞는 걸까.
눈물이 늘었다.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 책을 보면 자주 운다. 오늘만 해도 <슬램덩크>의 주제곡을 들으며 눈물을 여러 번 훔쳤다. 생각해보면 내게 필요한 건 ‘감동’이었다. 르포르타주를 보며 내가 느낀 것도 결국 생생한 삶의 현장이 주는 감동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내 삶에는 감동이 들어갈 자리가 완전히 비어 있었다. 감동 없는 삶을 반복해서 살아가고, 그 삶에 익숙해진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감동이 없어도 괜찮아. 다들 그렇게 살잖아.
언제쯤 나는 과거 아닌 지금 이 삶에서 감동을 느끼며 살 수 있을까.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에 기대어 살아야 할까. 일상의 사소한 부분에 감동을 느끼라는 누군가의 말에는 공감할 수 없었다. 복작이는 출퇴근 지하철과 전쟁에 가까운 업무들, 그리고 집에서 혼자 보내는 긴 시간은 내게 온기를 비추지 않았다. 그들은 대개 냉담했다. 답 없는 질문들이 주말 밤을 가득 채웠다. 감동 없는 시간이 흐르고 이렇게 또 내일의 전쟁은 다시 막이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