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아니니까

by 초생달

지난 몇 주 동안 몇 가지 업무에 쌓여 지냈다. 매일 한 시간 빨리 출근해서 남들보다 한두 시간 늦게 퇴근했다. 즐겁지 않은 일을 종일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도 시간이 부족했다. 가까스로 큰 짐 하나를 지난 금요일에 마무리하고 나니, 내 주변이 명료하게 보였다.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는 일상은 황폐했다. 인간관계는 녹슬어서 기름칠이 필요했고, 매일 꾸준히 하던 홈트레이닝은 입사일에 처음 마주친 직장 상사처럼 낯설었다. 몸은 무거웠고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는 심정으로 주말을 보냈다.


추석 연휴에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일만 했으니 제주도든 어디든 가지 못했다. 나라고 왜 여행을 가고 싶지 않았겠나. 내가 제주도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제주도의 바다와 마을, 아무도 없는 텅 빈 도로 곁을 걷는 게 얼마나 환상적인 일인데.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려니숲길. 머릿속으로 수십 번 떠올렸지만 결국 올해는 갈 수 없었다. 마음으로는 피눈물을 흘렸다. 억울했고 어디에든 화풀이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화를 풀 수는 없었다. 맥주 한 캔을 마시며 그냥 잊고 견뎠다.


내 인생의 8할을 인내, 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포기가 빠른 편이다. 애당초 부유해본 적도 없고 인생을 꽉 채워 살아본 적도 없다. 항상 어딘가 비어 있고, 뚫려 있는 채로 살았다.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허전한 마음은 그 마음대로 끌어안았다. 포용하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었다. 인생을 일찍 마감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지켜주지 못했던 동생 진정은, 나를 가장 사랑했던 할머니와 할아버지, 삼촌, 그리고 그 밖에 지금 이곳에 없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그들에게 빚진 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니 남은 생 동안 보답은 하고 살아야지. 그냥 가버리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태껏 이 악물고 견디며 살았다.


내가 살고 싶지 않을 때마다, 땅 밑 어딘가에서 날 붙잡아주는 존재들이 있다. 내 두 다리를, 팔을, 등을, 어깨를 붙잡으며 아직은 아니라고 토닥이는 존재들이 있었다. 내 삶의 무게를 덜어주는 존재들이다. 그럴 때마다 혼자 생각한다. 그래, 난 혼자가 아니니까. 그러고 나면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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