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 속는 셈 치고

by 초생달


퍼시 애들론 감독의 작품은 대개 생소하다. 그나마 알려진 것이 도날드 서덜랜드와 줄리 델피, 브렌든 프레이저가 나오는 <영거 앤 영거>(1995) 정도인데 깊은 인상을 남기진 않았다. 가장 유명하고 기억에 남는 작품은 1993년 작품 <바그다드 카페>다. 남편과 싸우고 나서 황량한 사막에 홀로 남겨진 독일 여인 야스민은 우연히 바그다드 카페, 그리고 그곳의 주인 브렌다와 만난다. 영화 소개글이나 음악만 들어도 대략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데 이 영화에는 날 유혹하는 것들 천지였다. 적막한 공간과 업무나 시간에 허덕이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그곳에서 무료하게 지내다 조금씩 무언가를 배우고 깨치며 ‘어딘가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유명한 배경음악까지 곁들여진다면 분명 나를 구렁텅이에 빠뜨릴 만한 작품이리라.



그래서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손쉬운 희망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 꿈의 상영시간이 끝나고 나면 현실의 내가 더 초라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내가 더 싫어지면 어떡하지. 부러 그 영화를 피해 다녔다. 다만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영화음악 <Calling you>를 즐겨 들었을 뿐이고. 몇 번이고 밀어내었지만 혼자 있는 밤이면 유혹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리고 난 예감대로 이 영화와 사랑에 빠졌다.



야스민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영화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브렌다의 사정도 남편과의 다툼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바그다드 카페 주변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그들이 어떻게 그곳에 모였는지 알 수 없다. 내가 이곳에 왜 태어나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그들도 그곳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모였다. 야근을 하거나 업무가 힘들 때면 자기 전에 이 영화를 틀어놓았다. 부메랑을 날리는 캠핑족 사내, 손님이 거의 오지 않는 주유소 카페를 지키는 브렌다와 가족. 배경처럼 황폐하던 그들 삶에 야스민이 들어오면서 바그다드 카페는 조금씩 바뀐다.



이 영화가 좋았던 이유는 야스민은 물론 카페 사람들이 노력하고 애쓰며 무언가를 얻어간다는 점이다. 야스민은 본래 마술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카페에 도움이 되기 위해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하다가 자신의 짐에 있던 마술 세트를 꺼내 마술 연습을 시작한다. 하긴,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겠어. 누구에게나 훈련과 연습은 필요하지. 야스민의 마술을 모두를 바꾼다. 화만 낼 줄 아는 것 같던 브렌다는 야스민과 함께 마술쇼를 선보이고, 브렌다의 아들은 피아노 반주를 통해 쇼에 함께한다.



노력하고 애쓴다는 것, 난 그 말이 그렇게나 좋았다. 시작은 초라하고, 끝은 허망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달라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그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야근에 시달려 파괴됐던 내 마음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그렇지, 누구나 노력하고 애쓰지. 삶의 마술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니까. 삶이 마술일 수 있다는 희망마저 없다면 이곳은 사막과 다를 바가 없잖아. 설령 그게 속 빈 껍데기라 할지라도. 인간은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이니까, 간절하게 붙잡고 있을 동아줄이 필요하다. <바그다드 카페> 중반부에는 야스민이 카페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방에서 혼자 마술을 연습하는 장면이 나온다. 도구를 들고 설명서를 연실 쳐다보면서. 난 그 장면이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되돌려 보았더랬다. 조금 긴 시간이지만 나도 아직 그 방에 머물고 있다. 손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별다른 연기력을 지닌 것도 아니지만 내게도, 그리고 내 삶에도 마술이 필요하다. 속는 셈 치고 그 마술을 믿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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