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전부야

by 초생달

내가 유별난 건지도 모른다. 혹은 반골 기질이 있다든가.


회의 도중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을 이야기했고,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대화가 오갔다. 그중 누군가가 어려운 단어를 쓰는 사람들이 싫다고 지적했고, 나는 ‘핍진성’ 같은 단어를 말하는 거냐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누군가 그 단어를 듣고 이렇게 반응했다. 나는 세상에서 그런 단어 쓰는 사람이 제일 싫더라.


그 말이 한참이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제, 일, 싫, 더, 라. 그, 런, 단, 어. 핍진성은 대학교에서 소설 이론을 공부하며 자주 들었던 단어다. ‘핍진(逼眞)하다’에서 나온 말로 ‘리얼리티’나 ‘개연성’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쉽게 말해 ‘문학작품에서 텍스트에 대해 신뢰할 만하고 개연성이 있는, 즉 그럴듯하고 있음 직한 이야기로 독자에게 납득시키는 정도’를 뜻하는 말이다. 모든 예술 작품은 자연이든, 일상이든, 사람이든 무언가를 보고 그걸 흉내(모방) 내는 데서 시작한다. 그걸 그대로 표현하느냐, 추상적으로 그려내느냐, 다른 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장르가 나올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가능하다고 믿어지지 않는 것보다는 불가능하지만 있음 직한 것을 택하는 편이 낫다”라는 문구로 허구적 진실의 가치에 대해 언급하면서 핍진성에 대한 효용성을 나타냈다. 진짜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것. 어떤 소설이 허구인 걸 알면서도 진짜처럼 느껴지도록 실감이 난다면 그만큼 핍진성이 탁월하다는 증거다.


‘문학청년’ 시절 오정희나 이청준, 최인훈 등 대가들의 소설책과 국어사전을 함께 들고 다니는 것은 내게 신앙과도 같았다. 김연수 작가의 초기 소설들도 그랬다. 특히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같은 단편을 보면서 국어사전을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 문장을 따라가던 눈길이 한 단어에서 멈추면 국어사전을 찾고, 그러다 앞뒤 맥락을 이해하고 나면 다시 멈춘 곳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다 다시 멈추고 움직이기를 반복한다. 쉽게 단번에 읽히는 글도 좋았지만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글도 소중했다. 그런 글은 내 머리를 뒤흔들고 눈을 번뜩이게 해줬다. 네가 알아야 할 세계가 아직은 많이 남았단다. 네가 아는 세계가 전부는 아냐. 넌 네가 걸어온 만큼만 알고 있잖아. 그러니 앞으로 네 숙제는 네가 걷지 않은 길, 혹은 네가 걸어야 할 길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이해하는 일이야. 왜냐고? 그래야 이 세계 전체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물론 그 단어들을 찾아본다고 내가 갑자기 이 세상을 깨우치는 기적 따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을 사는 일은 결국 이해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나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글을 다루는 사람에게는 그 ‘이해와 노력’이 중요하니까. 나와 다른 누군가를 ‘남’으로 인식하는가, 아니면 ‘내가 될 수도 있는 남’으로 인식하는가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는다. 그러니 내게 ‘핍진성’은 이해할 수 없으니 무시하거나 배제해야 할 단어가 아니라, 일단은 살펴봐야 할 단어다. 그게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왜 그 단어를 선택해야 했을까, 왜 그 단어여야 했을까, 그리고 그 단어는 내게 어떤 의미를 전해주나.


우리 말과 글을 다루는 작가나 에디터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이해하는 세계의 넓이가 전부는 아니니까. 내 보폭이 얼마나 빠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빠르게 걷는다고 해도 세계의 끝에는 다다를 수 없을 것 같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속상할 일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무한한 정신의 세계가 있으니 말이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단평을 보고서 ‘명징’과 ‘직조’라는 새로운 세계와 만난다면, 그것 또한 여행이다. 우리는 이제 ‘명징’과 ‘직조’를 모르던 세계에서 ‘명징’과 ‘직조’를 알고 있는 세계로 이동했다. 이제 남은 것은 ‘명징’과 ‘직조’를 이해하는 세계로 가는가, 다른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가 하는 문제다. 그건 전적으로 당신의 자유다. 하지만 ‘명징’과 ‘직조’의 가치를 그저 어려운 단어라고 치부하며 무시하고 비난한다면 우리 세계의 일부분은 닫히고 만다. 벽이 세워진다.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더 이상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내 마음속에는 얼마나 많은 지뢰밭이 있을까. 앞에서 편견이 없는 사람처럼 거들먹거렸지만 실은 나도 비슷하다. 핍진성에는 호기심이 생기지만, 다른 유행어나 이야기를 접하면 제대로 살펴보기도 전에 거부감을 드러낸다. 제대로 들여다보기보단 눈을 감고 외면한 뒤 다른 길을 찾는다. 그게 편하다. 망각은 쉬운 일이니까. 하지만 망각할수록 내 마음에는 얼마나 많은 벽이 세워지고 있는 걸까. 내가 가야 할 길은 얼마나 비좁아지고 있을까. 내 인생을 간편하게 만들기 위해 내 앞에 놓인 많은 가능성을 스스로 잘라내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중 어떤 것들이 내 마음에 와닿을지는 알 수 없다. 겉만 봐서는 모른다. 좀 더 깊이 다가가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사람도, 업무도, 사는 일도 똑같지 않을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느슨한 연대와 낭만적 개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