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조용하게, 나만의 메리 크리스마스 재즈’ ‘너와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겨울, 너와 함께 파리를 걷고 싶어’ ‘고백을 채색하려 해봐도 숨이 희었다.’ ‘나도 내 감정을 모르겠어’ ‘아무도 없는 바다’
편지나 문자 속 문구 같지만, 이건 요즘 내가 즐겨 듣는 유튜브의 플레이리스트들이다. 과거에는 FM 라디오에서 DJ와 방송작가가 곡들을 구성했다면, 요즘에는 누구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자신들의 감성과 생각에 맞춰 플레이리스트를 만든다. 물론 음악 저작권 문제를 고려한다면, 불법 업로드로 간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콘텐츠는 해당 음악인이나 기획사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리스트의 음악을 듣다가 어떤 곡에 꽂히면 곡 제목과 음악인의 이름을 확인하게 된다. 내게는 에릭 사티·진수영·나카무라 유리코의 피아노 연주, 그리고 일본 기타리스트들의 기타 연주가 특히 그랬다. 그리고 어떤 플레이리스트에서도 손쉽게 발견할 수 있는 빌 에반스의 연주는 내게 신앙과도 같다. <Emily>라는 곡을 처음 들었을 때의 희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 곡을 듣자마자 그의 검은 뿔테 안경과 잔뜩 멋을 부린 포마드 컷, 그의 두 손가락 사이에 들린 담배 한 개비와도 사랑에 빠졌다.
플레이리스트 유튜브 콘텐츠의 댓글에는 저마다의 신앙 고백이 한창이다. 첫 곡 도입부를 듣자마자 사랑에 빠졌어요, 완전 제 취향입니다, 어쩌면 제 마음을 이리도 잘 알고 계신가요… 자신만의 생각으로 마음대로 구성한 플레이리스트에는 그만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다. 그만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 플레이리스트에 빈 구멍이 많다는 뜻이다. 청취자가 자신의 마음, 그러니까 괴로움과 서러움, 설렘과 고요함 등을 담아낼 공간이 많다는 뜻이다. 훌륭한 플레이리스트는 언제나 나사를 꽉 조이지 않는다. 느슨하게 풀어둔다. 예를 들어 ‘밤이 내리고 재즈가 흐르면’이라는 제목에 맞게 곡들이 구성돼 있는데, 사실 청취자들은 이 곡들이 어떤 이유로 이런 구성에 함께하게 됐는지 알 수 없다. 추측할 뿐 명확한 이유는 모른다. 그러니 듣는 사람들은 더 많이 상상하고 느끼고 꿈꾼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명제는 청취자의 마음에 들어가 각기 다른 색으로 빛을 낸다. 듣는 이유도, 감동하거나 설렘을 느끼는 이유는 다르지만 모두 ‘즐긴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작년부터 나는 실시간 순위와 줄 세우기에 질려 멜론을 버리고 유튜브 뮤직으로 갈아탔다. 무엇보다 경쟁하지 않는 음악들이 있어서 좋았다. 똑같은 음악이라도 ‘그냥 음악’과 ‘89위 음악’은 느낌이 다르다. 알고리즘으로 전혀 몰랐던 음악을 듣게 되는 우연도 좋다. 알고리즘에 이끌려 데이비드 맥베스의 <Mr. Blue>라는 곡을 들었을 때 덤덤하고 무심한 척 손을 내미는 듯한 곡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종일 그 곡을 반복해서 들었다. “Our guardian star lost all his glow, The day that I lost you.(당신을 잃은 날, 우리의 수호 별은 빛을 모두 잃었어요.)” 사랑을 잃은 남자가 자신을 ‘Mr. blue’라 명명하는 이 낭만적인 곡은 한동안 내 하루 동안의 플레이리스트에 자주 오르내렸다.
느슨한 감각이 좋았다. 매일 무언가를 이뤄야 하고,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 직장 생활에 지쳐 있었으니까.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 생각해도 그만, 생각을 안 해도 그만이다. 손 가는 대로 플레이리스트를 골라 듣다 보면 내 주말은 항상 음악들이 뿜어내는 이야기들로 가득 찼다. 그 이야기가 위로가 됐다. 혼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혼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느낌. 우리는 각자 존재하지만, 때때로 알 수 없는 끈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모호한 믿음, 느슨한 연대. 저마다 다른 이유로 같은 플레이리스트를 듣고, 저마다 다른 개인(들)이 각자 다른 낭만에 취한다. 수천수만 개의 꿈이 흐르는 시간이 내 주말 밤 어딘가에 둥둥 떠 있었다.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손에 잡을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지만 함께한다는 감각, 그 느낌만으로도 내 주말 밤은 아늑했다. 이런 시간에서야 비로소 나는 내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고 있다고 실감한다. 플레이리스트를 듣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잡념이 끼어들지 않는다. 지난 일을 후회하지도, 앞으로의 일을 부러 걱정하지도 않는다. 음악이 흐르는 그 순간을 만끽한다. 느슨한 연대를 느끼는 낭만적 개인의 어느 늦은 주말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