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 대가 된 이후 유독 한 마디가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난 돌아갈 수 없구나. 청춘 남녀의 결혼식, 활기 넘치는 청춘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음악들, 거리의 20대를 볼 때마다 절실히 느낀다. 돌아갈 수 없구나. 난 이제 앞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나이를 더 먹는 일만 남았다. 타임슬립을 소재로 한 영화들을 좋아했다. 영화에서는 그토록 쉬워 보이는 시간여행이 현실에서는 아직도 요원하다. 간절히 애쓰고 바라더라도 난 돌아갈 수 없다.
언젠가 내게 세상은 신기한 것들 천지였다. 내가 왜 나인지 신기하고, 너는 왜 너인지 궁금하고, 지하철의 이름 모를 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는지, 엄마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소년은 왜 징징거리며 울고 있을까, 추운 겨울날 거리를 조심스럽게 걷는 비둘기는 배고프지 않을까, 바람은 왜 이쪽으로 불고 내 외투 옷깃은 입술에 닿을 때마다 왜 그리도 부드러웠을까. 세상은 이야기로 가득했다. 수만 수억 개의 이야기들이 버튼을 드러내놓고 있었다. 어서 이 버튼을 눌러서 날 들여다봐 주세요.
만나는 사람들 모두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국토대장정 참가를 결정하고서 첫 모임에서 만난 사람 중에는 이미 경력자들이 수두룩했다. 어느 초가을 종로의 주말 밤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서울부터 해남 땅끝까지 긴 고생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런데도 다들 밝았고 눈은 빛났다. 사서 고생해서 좋았고 그때 배운 삶과 경험은 이후 내가 살아가는 인생의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 정치와 행정 이야기를 싣던 지역 신문사에 입사했던 20대 시절, 나는 국회 출입 기자인 사수에게 이런저런 보도자료를 정리하고 어떤 곤란한 상황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배웠다. 하지만 문학밖에 몰랐던 내게는 모든 게 생소했고 며칠 지나지 않아 포기했다. 일주일 만에 퇴사 의사를 밝혔을 때 허탈해하던 사수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책을 좋아해서 서점 직원으로 일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남자 서점 직원 대부분은 매대가 아닌 창고와 더 친해져야 했다. 매일 수백 수천 권의 책을 날랐고 며칠 만에 나는 이 일이 막노동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던 팀장의 따뜻한 얼굴도 또렷이 기억난다. 실패하고 포기하고 극복하는 모든 과정에서 나는 매번 새로운 감각을 느꼈고, 그때마다 희열을 느꼈다. 이런 게 사는 거지. 그 감각은 내게 엄청난 오르가슴을 느끼게 해줬다. 인생은 모험이고 탐험이구나. 우거진 수풀은 걷어내 지나가면 됐고, 바닷길은 배를 이용하면 됐다. 북극에서 오로라를 보는 게 일생의 목표이던 시절이다.
생각해보면 내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요즘에는 많은 데 흥미를 잃었다. 먹고살기 위해 일하고, 주변 사람들 말에는 별 관심이 없다. 주변에서 무얼 하든 흥미롭지 않고, 노트북이나 모바일 콘텐츠 속 청춘과 연애 이야기는 줄거리만 들어도 질투가 난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질투심이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은 것 같아서 그렇다. 그러니 이 나이를 먹고도 갈수록 옹졸해지고 재미없는 사람이 돼간다. 하루는 빨리 죽고 싶다가도, 하루가 지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비관하며 술을 찾는다. 40대 초반부터 퇴직 요청을 받는다는 최근 뉴스를 보고서는 그게 더 심해졌다. 한창이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제2의 인생을 설계할 때가 왔다. 이제 무엇으로 먹고살아야 하나. 대학교 때 글을 읽고 문학을 꿈꾸며 열심히도 생각하고 썼다. 그때 배운 ‘잔재주’를 재능이라 믿으며(나 자신을 세뇌시키며) 여태까지 버텼다. 뛰어나지 않음을 알지만 뛰어나지 않아도 일할 수 있다고 믿으며 생존해왔다.
하루는 요절했어야 한다고 독백하기도 한다. 즐겨 보는 유튜브 영화 리뷰 채널 ‘삼촌의 비디오’는 18일 톰 행크스의 1988년 영화 <빅>의 이야기를 다뤘다. 채널 주인은 영화를 이야기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평생 10대 후반~20대 초반의 나이로 살다가 한 방에 죽는 걸 꿈꾸기도 했노라고. 나이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온갖 부와 명성을 거머쥔 대배우 톰 행크스조차 한 토크쇼에 출연해 나이를 먹고 보니, 나이를 먹는 게 좋은 일이 아님을 알겠다고 말했다. 그걸 이제야 깨달은 게 문제다. 그때는 몰랐다. 어릴 때는 어서 나이를 먹어 늙고 현명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보니 난 늙긴 했지만 현명하지는 않다. 그리고 어른이 된 일은 전혀 재미있지도, 흥미롭지도 않다. 매일 한 가지씩과 이별하는 기분이다. 오늘은 짜릿한 청춘 이야기와 이별하고, 내일은 첫 만남의 설렘을 잊고, 그다음 날에는 내게 소중했던 어린 시절의 인연들이 희미해진다.
나이를 먹고 나서 현명해졌다거나, 무언가 중요한 걸 깨달았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내가 아는 뛰어난 작가나 영화감독들 대부분은 젊을 때 걸작을 남겼다. 일을 저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 청춘의 시간에서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이 나왔다. 김애란과 박민규, 편혜영의 소설은 초기작들이 지금보다 더 훌륭했다. 허진호 영화감독의 작품도 <8월의 크리스마스>나 <봄날은 간다>가 훨씬 낫다. 프란츠 카프카는 30대 때 빛나는 작품을 남긴 후 40대 초반에 생을 마감했고, 프랑수아 트뤼포가 ‘누벨바그’의 빛으로 떠오르며 <400번의 구타>를 칸 영화제에 내놓은 건 고작 스물일곱 살 때였다. 나이를 더 먹는다고 무언가 더 깊어진다거나 무르익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깊이나 경험이 빛을 발하는 분야는 따로 있다.
그렇다고 나이를 먹었다고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쉽게 흥분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차피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겁먹을 일은 없다. 흥미를 잃은 것도 많지만, 대신 내 몸의 변화에는 좀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내가 뭘 해야 안정을 찾는지, 무엇을 먹고 느끼고 만나야 행복할 수 있는지 좀 더 명료하게 보인다. 빛나는 미래는 보이지 않지만, 적어도 현재의 소중함은 좀 더 분명하게 피부에 와닿는다. 현실이 차곡차곡 쌓이면 그게 곧 미래가 될 테니까, 라고 생각하며 나 자신을 위로한다. 어차피 미래는 내게 다가오지 않은 시간이니까. 큰 꿈이나 로망은 버렸지만, 대신 주변 사소한 것들에는 더 애착이 간다. 내 두 발로 밟는 눈, 낙엽, 흙, 내 손으로 직접 느끼는 이불의 감촉, 내 코로 직접 느끼는 커피의 향긋한 내음과 세탁을 마친 뒤 빨래에서 느껴지는 섬유유연제 냄새, 오늘도 무사히 하루가 지나갔다고 느끼며 잠자리에서 눈을 감으면 느껴지는 주변의 온기와 아늑한 어둠. 많은 것을 잃었지만 얻은 것도 있다. 더 이상 훌륭한 무언가 되기를 꿈꾸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다. 하루하루를 차곡차곡 쌓는다. 요행을 바라지 않는다. 내 몸과 마음으로 직접 느끼는 감각을 믿는다. 어쩌면 그게 날 더 나은 세계로 데려다줄지도 모른다. 뭐, 아니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테다. 째깍째깍 흐르는 지금, 이 순간만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