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던 시절 <슬램덩크>가 인기 있었던 건 사실이다. 나 또한 학교 앞 문방구나 서점에서 새로 나오는 <슬램덩크> 시리즈를 사서 보고는 했다. 하지만 요즘 한국 인기만큼 열광했느냐고 묻는다면 의문 부호를 달 수밖에 없다. 폭력적인 배경을 가진 강백호와 정대만에게 난 애증의 감정을 품었다. 멋진 인물들이지만 폭력배와 어울렸던 과거가 싫었다. 나는 키가 작고 운동 신경이 둔한 왕따였다. 농구를 잘하지 못한 것은 물론, 남들이 하는 걸 즐겨본 적도 없다.
정말 이상했던 것은 그런데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 개봉일이 정해지자마자 가슴이 쿵쾅거렸다는 거다. 그건 마치 그 시절 농구에 열정을 바친 청춘의 감정과도 같았다. 예고편이 순차적으로 공개될 때마다 몇 번이고 돌려보았는데, 혼자 볼 때는 눈물을 훔칠 지경이었다. 코로나19 이후 오랫동안 찾지 않던 영화관에 발을 들였다. 그것도 사운드가 남다르다는 돌비(Dolby) 관을 예매했다. 당일 영화관을 찾았을 때 나는 전날 영화표를 예매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하다니. 기왕 영화관을 찾았으니 안 볼 수 없어 가까운 시간대 영화표를 다시 샀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내가 왜 그렇게 <슬램덩크>에 열정을 바치지 않았는지, 그런데도 왜 그토록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열망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
<슬램덩크>와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메시지는 특별하지 않다. 포기하지 마라,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 모든 걸 쏟아부어라, 열정을 보여라. 이미 질릴 대로 질린 자기계발서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메시지를 반복할 뿐이다. 게다가 그건 성공을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였다. 그들이 전국대회에 나설 수 있었던 건 어쨌든 도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해남고등학교와 함께 진출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강백호가 덩크를 림에 꽂으며 경기를 마무리하던 그때를 기억해보자. 그들은 약자였으나 훌륭한 동료와 적절한 코칭을 받으며 성장했고, 결국 그 성장의 보답을 받았다. 산왕공고 전 이후 3회전에서 패배했다지만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2회전 산왕공고 전의 승리로 충분히 많은 걸 얻었다. 명성과 인정 말이다. 그 이후 북산고등학교를 만만히 볼 학교는 아무도 없었으리라. 신현철과 정우성이라는 톱 플레이어가 뛰는 학교를 이겼는데, 누가 쉽게 보겠는가 말이다. 성공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마지막에 패배를 안겨주는 건 페이크에 가깝다. 그들은 절대 불쌍하지도, 안타깝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성공 스토리를 보여주는 스포츠 성장 드라마다. 우린 이런 작품을 이미 많이 봐왔다. 어린 시절부터 실패를 반복하며 자라온 나는 성공한 경험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성공한 이들에게 아주 쉽게 질투심을 느낀다. 작품 속 청춘들이 과연 쓰라린 패배의 감정을 이해하고 있을까. 난 <슬램덩크> 속 강백호와 서태웅의 감정에 쉽게 이입할 수 없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인공은 송태섭이다. 그래서 약간은 설렜다. 그는 키가 작은 농구 선수였고 내가 이입하기 손쉬운 인물이니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나는 송태섭에 이입할 수 없음을 느꼈다. 인정하는 건 쉬웠다. 그는 난관을 극복하고 팀에 좋은 기회를 만들어줬다. MVP까지는 아니더라도 영화의 주인공이 될 만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송태섭에게는 좋은 동료들이 있었다. 엄청난 성장세를 보여준 강백호, 타고난 재능을 지닌 서태웅, 오래 방황했으나 다시 일어선 정대만, 든든한 주장 채치수, 엄마처럼 따뜻한 권준호까지. 좋은 동료들과 함께 성공의 경험을 쌓았으니 이제 두려울 게 없겠지. 그러니 미국 진출이라는 엔딩도 가능했을 것이고.
어떤 범죄 프로그램에서 한 프로파일러가 그런 말을 했다. 성공의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삶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다르다고. 그러니까 성공의 경험을 보유한 사람들은 계속 도전하면 할 수 있다는 걸 안다. 본인이 그 성공을 두 눈으로 봤으니까. 하지만 실패만 거듭한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그러니까 노력과 열정보다는 침묵과 나태함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성공과 희망이 뭔지 모르는 사람에게 성공과 희망을 가르친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걸 배운다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너무 많이 실패하고 좌절했다. 때로는 쉽게 포기했고, 때로는 끝까지 부딪쳐봐도 잘되지 않았다. 패배 의식이 나를 점령하도록 내버려 뒀다. 경쟁하는 게 두려웠고, 두렵다. 경쟁해봤자 질 게 뻔하니까. 아마 나는 <슬램덩크> 속 벤치 멤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벤치에도 서지 못하는, 그러니까 화면 밖에서 서성이고 있을 패배자 중 한 명일지도 모른다. 농구는 역시 내 길이 아닌가 봐. 백호는 좋겠다, 준호는 좋겠어.
패배를 반복해서 학습하며 나쁜 길로 빠지지 않았던 건 그나마 한 가지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나처럼 밑바닥에서 기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관찰력이다. 추운 날 조용히 사라져가는 독거 중년과 노인, 혹은 거리를 떠도는 노숙자들,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끝끝내 스러지려 하는 사람들. 그걸 떠올리기만 해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 세계가 지옥 같다고 느낄 때면 그들을 떠올리며 다짐한다. 아직은 내가 바라봐야 할, 생각하고 읽으며 써야 할 세계가 남아 있다고. 다시는 수면 위로 올라갈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잘 버텨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그들에게, 그리고 갈 길 잃은 내 마음에 ‘이름’을 붙여줄 거라고. 단 하나뿐인 이름을.
그 어떤 이의 삶도 헛되지 않다. 경쟁에서 매번 탈락하고, 벤치에도 설 수 없는 존재들일지라도 저마다 목소리를 갖고 있다. 그 목소리는 모두 특별하다. 그 특별한 목소리들에 귀 기울이며 생각하고 읽고 쓴다. 그걸 사명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