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의 노래 <안녕>

1990년대 초반 신해철

by 초생달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신해철 솔로 앨범 1집은 1990년에 발표됐다. 타이틀곡 <슬픈 표정(은) 하지 말아요>가 많은 사랑을 받았으나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당시 내가 가장 사랑했던 곡은 <안녕>이라는 곡이다. “난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라는 후렴구를 흥얼거렸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초등학교 학년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건 학기 초 담임선생님의 지휘 아래 진행되는 자리 선정 시간이다. 키가 작은 순서대로 앞에서부터 자리에 앉았고, 나는 두 번째나 세 번째쯤 되는 자리였던 것 같다. 내 옆은 나와 비슷한 키의 여학생이 앉았다. 얼굴도 이름도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하게 떠오르는 것은 하나 있다. 당시 유행 가요를 무척 좋아해서 공책에 노랫말 끄적거리길 좋아했다. 나도 가요톱텐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신해철이나 당시 인기 있는 가수들의 노래를 즐겨 들었지만 부모님 앞에서는 흥얼거릴 수 없었다. 남녀상열지사를 다루는 당시의 노랫말을 부모님은 꽤 낯뜨겁게 여겼으니까. 어린애가 그런 노래 함부로 부르는 거 아니다. 그대를 온 마음 다해 사랑한다는 노랫말들이 대체 왜 그렇게 문제였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되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부모님이 가장 싫어하는 가수는 김원준이었다. 1992년 발표한 1집 타이틀곡 <모두 잠든 후에>를 내가 따라부를 때면 노발대발하셨다. 뭐? 모든 잠든 후에 뭘 한다고? 어린애가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신해철의 노래 <안녕>이나 그보다 몇 년 전에 히트했던 도시아이들의 <달빛 창가에서>를 나만 들을 수 있는 아주 작은 소리로 흥얼거리며 등교했던 어느 날, 내 옆 짝꿍은 내가 부르는 노래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아주 좋아하며 반응했다. 너도 신해철 좋아하니? 나도 좋아하는데. <안녕>을 특히 좋아해! 그러고는 그 아이는 마치 보물 상자를 꺼내듯 노트 한 권을 펼쳐 내게 보여주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노랫말을 손수 적은 노트, 일명 ‘최신 힛트쏭 가요 노트’였다.

이걸 다 적은 거야? 응, 난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적거든. 내 꿈은 가수야. 그러고 보니 짝꿍은 목소리가 곱고 아름다웠던 것 같다. 내가 신해철 노래를 제대로 알려줄까? 그때부터 짝꿍과 나의 은밀한 가창 수업이 시작됐다. 쉬는 시간마다 계속되는 수업에서 짝꿍은 꽤 엄하고 진지했다. 일단 한번 불러볼래? 어느 부분이 틀렸는지 알려줄게. 내가 신중하게 ‘선물가게의 포장지처럼~’을 부르면 깐깐하신 강사님께서는 바로 지적했다. 아냐. 그 부분 멜로디는 그게 아냐. 음이 너무 낮아서 부르기 힘들지? 근데 그렇게 부르면 맛이 살지 않아! 잘 들어봐. 내가 불러볼게.

나는 가르쳐달라고 한 적도 없지만, 짝꿍은 그토록 열정적으로 내 노래 지도에 나섰다. 틀렸어, 라는 말과 함께 들고 있던 연필로 내 손가락을 건드렸다. 또 틀리면 그때는 세게 때릴 거야. 나는 가수가 되고 싶지 않아, 라는 말은 짝꿍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변진섭이나 나미, 김완선의 노래들을 가르쳐주었다. 김민우의 <사랑일 뿐야>도 배웠던 기억이 난다. 고음이 약해서 목소리가 흩어지는 나와 달리 짝꿍은 후렴구의 고음 부분에서도 깔끔하고 유려하게 노래를 소화했다. 짝꿍과는 그 외에 특별한 추억이 전혀 없다. 서로의 집에 놀러간 적도 없고, 방과후에 따로 만나 어디로 놀러간 기억도 없다. 우리는 ‘노래’ 하나로 뭉친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였다.

1990년 전후의 노래가 들리면 문득 그때 짝꿍이 생각난다. 얼굴을 기억할 수가 없어서 대개 흐릿한 인상이나 유사한 외모의 다른 친구들 얼굴을 대신 떠올릴 때도 있지만. 난 아직도 짝꿍이 왜 그렇게 내게 열정적으로 노래를 지도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누군가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함께 나누고 싶었을까, 아니면 내게 조금은 관심이 있었을까. 어쩌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서로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살아갈 것이다. 너는 이미 내가 기억에도 없을 것이고, 나 역시 노래들로만 너를 기억한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은 내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단다. 네 덕분에 나는 아직도 <안녕>이나 <사랑일 뿐야> 노랫말을 외울 수 있으니까.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무엇을 꿈꾸든, 네가 행복하고 또 평온하길. 그리고 그 노래들을 다시 들을 때면 네게 혼나면서 노래 배우던 나를 기억해주길. “난 이제 더 이상 눈물을 흘리긴 싫어”라는 노랫말처럼 눈물을 닦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노래들을 들으며 혼자만 들을 수 있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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