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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관우 Nov 03. 2020

그대에게

 방송 준비하려고 자료 찾다가 처음으로 대학가요제 그대에게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게 됐다. 신해철은 강변가요제 탈락을 교훈 삼아서 작정하고 그대에게란 곡을 만들었다고 했다. 마지막 순서였기 때문에 자칫 지루해진 관객들의 귀를 확 사로잡을 수 있는 웅장한 전개로 곡을 시작했고, 후반부에는 일부러 곡이 끝나는 듯한 느낌을 주고 관객들의 박수를 유도한 뒤에 계속해서 노래를 이어간다. KBS 어느 방송 인터뷰에서 신해철이 직접 한 말이다. KBS 사내망으로만 접속할 수 있는 아카이브에는 꽤 많은 옛날 방송 자료가 보존되어있다. 아마 대학가요제 비하인드를 소개하는 원고를 쓰다가 봤던 자료였던 것 같다. 이렇게 언제 어디서 봤는지도 모르는 기억들이 갑자기 훅 치고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런가 하면 통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덤덤해지는 일들도 있다. 한 번은 그랬다. 차에서 어떤 가수의 싸인 CD가 나왔다. 나중에 역주행으로 유명해진 노래가 실린 앨범이었는데 막 앨범이 나왔을때 내가 하던 방송에 출연했던 모양이다.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 나는 어쩌다 이 CD를 받게 됐을까?


 이름이 쓰인 싸인CD를 받는 건 참 신기한 일이었다. 좋아했던 가수, 요즘 제일 인기 있는 가수들 앨범은 더 그랬다. 생방송까지 시간이 남아서 대타DJ를 하러 온 아이돌이랑 둘이 편의점에 가서 불닭볶음면 먹던 일도. 학교 다닐 때 들어봤던 이름이 그대로인 라디오 프로그램을 내가 하게 됐을 때도. 이제는 더 신기한 일이 없다. 생방송인데도 어쩜 저렇게 차분한가 신기했던 선배들처럼 방송사고가 나도 아 큰일났다!가 아니라 아, 얼른 이렇게 수습해야겠구나 한다.


 그대에게 영상을 보고 나서는 통 일이 안 잡혀서 딴짓을 하고 있다. 이미 새벽 1시가 훌쩍 넘었고, 오늘 써야 할 원고는 내일로 밀렸고, 잠은 늦었고, 내일 아침 10시엔 미팅이다. 잠을 더 못자고 내일 더 바쁠걸 알지만 어떻게든 일은 끝난다는 걸 안다. 어떻게 알았나 싶게 아는 것만큼 잊어버리는 것도 많다. 오늘 어떤 이유로 어떤 사람들의 이름이 검색어에 올랐는지 안다. 며칠 지나면 다 잊어버리는 일의 반복. 그래도 요즘 유행하는 책 마냥 삶은 무한궤도, 킵고잉이란다. 그래야지. 바퀴가 땅에 처박히지 않게 내 갈 길은 내가 깔며 전진 또 전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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