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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관우 Jan 10. 2021

프리랜서 방송작가를 그만두게 됐습니다.

 신용카드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KB장기카드대출이 없었더라면 아마 진작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집으로 내려갔을지도 모른다. 높은 이자로 갚아도 갚아도 끝이 없었지만 유일하게 내가 돈을 빌릴 수 있는 수단은 그뿐이었다. 똑똑하게 단 돈 5만 원이라도 삼성전자 주식을 사둔다거나, 치킨 한 번 사 먹을 돈으로 몇 끼를 더 해결하는 알뜰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면 물론 그런 일은 없었겠지만. 


 남자 방송 작가 중에는 동년배 중에 가장 연차가 많은 편이다. 군대 다녀와 칼복학해서 졸업한 2년제 대학을 마치고 1월부터 일을 시작해서 2월이던 졸업식도 촬영 나가느라 못 갔으니까. 그만큼 빨리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20대에는 정말 지지리도 못 벌었다. 연차가 얼마 안 되는 방송작가는 못 버는게 너무 당연한 곳이었다. 라떼는 더했다는 선배들이 고생배틀을 걸어오면 할 말은 없지만 물가 상승률을 좀 고려해보면 뭐 크게 다를 건 없을 거다. 막차 타고 집에 들어갈 수 있으면 그게 그렇게 고맙던 tvn 막내작가 시절 내 월급은 80만 원이었다. 연차가 쌓일수록 돈은 점점 더 벌게 되긴 하는데 이상하게 돈이 없었다. 2백 얼마를 겨우 벌 때도 방송작가로 내 무기 하나쯤은 있어야겠다 싶어서 월에 40만 원씩 내는 작사 학원을 다니기도 했고, 3백 얼마를 겨우 벌게 돼서는 하루에도 서울 여기저기 미팅 다니는 일이 힘들어서 중고차를 하나 사기도 했다. 차를 살 때쯤부터 아, 이건 안되겠다는 위기를 느꼈던 것 같다. 은행에서 대출이 나오지 않았다. 4대 보험이 되는 회사 재직증명서가 없으면 일단 창구에서 대화조차 되지 않았다. 조금 억울한 마음으로 캐피탈 대출을 받아 높은 이자를 내고 차를 사게 됐다. 미친듯이 일을 하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마침 한창 일할 연차였다. 방송, 행사, 콘서트, 기업 홍보영상, 어쩌다 책도 내보게 됐고. 그냥 구성작가가 할 수 있는 카테고리다 싶으면 뭐든 맡아서 했다. 


아직은 세상의 그 어떤 누구도 나를 보고 밀어준다 말 한적 없으나

나는 한다면 한다 닥치는대로. 

뭐든 맡겨만 주십쇼 하는데 싫어할 이 있소?

난 뜨게 되있다니까 아따 한번 두고 보쇼.

(조PD 5집 – 비밀일기) 


 친구들을 만나면 먼저 술값을 계산하고, 남들처럼 적금도 들고, 카드 값 내는 날에는 돈 10만 원이 부족해서 가족들한테 친구한테 미안한 부탁을 하게 되는 일이 없어지고, 자투리 돈으로 관심 있는 주식도 사 보고. 20대에는 느껴보지 못한 이 여유란 뭐람. 엄청나게 행복했다. 나만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열심히 해도 안되는 벽을 만난 거다. 집. 


 결혼을 하고 싶어졌고, 누군가와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서울에서 마련하는 일은 몇 년 박 터져라 일한다고 해결될 사이즈가 아닌 거였다. 기왕이면 더 좋은 곳 집을 마련하고 싶은 욕심이 누가 없겠나. 결국은 어른들이 그렇게나 말하던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한 나이가 됐다. 은행과 대화할 수 있는 수단. 


 이제 낮에는 스타벅스가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으로 출근을 해서 오디오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됐다. 사무실에 내 책상이 생겼다. 코로나 때문에 카페에서도 일을 할 수 없게 되고부터는 집에서 일과 휴식을 모두 해야하는 프리랜서 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스벅에서 일하는 메뚜기들을 보고 ‘아니, 집에서 하면 될 일을 꼭 저렇게 나와서 해야 되나?’ 라고 말했던 사람들도 재택근무란 걸 해보게 됐다면 이제 우리를 이해하겠지? 


할 일을 다 하면 퇴근이란 걸 한다. 취미와 일의 경계가 참 애매했던 터라 퇴근을 하고 나면 또 뭐든 쓰고는 있을 거다. 이 시간들은 5년, 10년 후 나를 또 어디로 데려가게 될까. 그게 어딘진 몰라도 하나는 안다. 그냥 닥치고 쓰면 그게 잘 하고 있는 거라는 거. 


 출근해서는 PD, 퇴근해서는 작가가 되는 서른네 살의 1월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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