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
매화가 추위 속에서 피어 가는 한 겨울, 난 하나의 계획도 없이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러시아로 향했다. 깊은 심연을 품은 바이칼 호수로 떠나는 3일의 기찻길에서 하나의 상념에 사로잡혀 너와의 추억을 되새긴다. 한 움큼의 거센 눈보라를 맞으며 꿋꿋이 열차는 철도를 따라 흘러간다. 눈을 뜨면 시작되는 기차 안 생활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언제 밥을 먹든, 언제 씻든, 어느 시간에 무엇을 하는 것은 이 공간에서는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는 것이다. 이 공간에서 허락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 흔한 휴대폰도 여기선 먹통이다. 기껏해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책을 읽는 다든지 혹은 잡스런 사념을 정리하는 것뿐이다. 자그마한 창문 속으로 보이는 설원처럼 새하얀 눈발이 날리듯 책 속의 글이 날릴 때쯤엔, 선택지는 생각에 잠기는 것뿐이다. 열차 승무원 칸, 사모바르에서 뜨거운 커피를 탄다. 테이블에 얹어 놓은 커피의 하얀 김을 보면서 살며시 눈을 감으면 옆에 없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히 떠오르게 된다. 더 이상은 내게 특별히 의미조차 없는 행위인 걸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의식적으로 그러한 행위를 행한다. 네가 없었던 시간은 내게 길을 잃어버린 양 마냥 방황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난 깊은 심연의 바닷속에 빠진 것처럼 네게 사로잡혀 과거를 생각하며, 무기력하게 너 없는 하루를 버릇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네가 나를 떠났을 때, 나에겐 너무나 큰 마음속 공동이 생겨버렸고 그건 어떠한 방식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구멍이 되어버렸다. 사랑하고 사랑받느라 바빴던 그 시절엔 몰랐던 것들이 네가 없어진 지금, 너무나 큰 빈자리로만 다가온다. 세 살배기 아이가 애지중지하는 인형처럼 품속에 소중히 껴안은 채 너의 온기를 느끼던 일이 간절히 그리울 줄 알지 못했다. 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눠야 했던 그날, 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너이기에 나눌 수 있었던 대화는 더 이상 내게 의미를 갖지 못한다. 테이블 사이에 커피 한 잔을 놓고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던 시간도, 혼자이기에 무의미해졌다. 세월이 흐르면 여타의 다른 사람처럼 조금만 지나면 너 또한 기억 속에서 무뎌져 갈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난 너와 마지막 이별을 약속하던 그 자리, 그 시간에서 멈춰있다. 조금만 방심하는 순간에는 너와의 추억이 쏟아져 머릿속에 떠올려진다. 네게 ‘그만하자’라는 말을 건넨 순간, 그리고 그 말을 끝맺은 채 뒤돌아가던 그 길이 아직도 생생히 살아있다. 네게 ‘그만’이라는 말을 건넸지만 난 ‘아직’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냉정히 돌아서던 너의 모습에 후련하기보다는 답답했고, 무덤덤하기보단 아쉬웠다.
너를 처음 본 그 날, 추운 한 겨울이 지나고 봄비가 내릴 즈음 넌 내게 다가왔었다. 온도계의 숫자가 땅보다 하늘에 더 가까워질 무렵 시작된 학기, 봄 향기가 물씬 베인 학생들로 가득찬 강의실 안에서 수수한 모습의 너를 처음 보았다. 일주일에 두 번 널 멀리서나마 지켜볼 수 있는 그 시간이 내겐 두근거림의 연속이었다. 귀 밑까지 오는 짧은 단발, 청바지, 단화를 신은 짙은 인상의 널,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다. 카뮈가 그로니에를 만났을 때 마냥 넌 내게 신선함 그 자체였다. 텅 빈 강의실에서 모여 토의를 할 때, 한쪽에 맺던 가방이 툭 떨어졌다. 사람들과의 얘기 도중에 도저히 가방을 주울 수 없어, 그저 잠깐 바라보기만 한 채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 나를 문득 바라보던 네가 떨어진 가방을 주워 책상에 가지런히 올려줄 때의 두근거림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기만 하다. 난 그런 네가 좋았고, 따스한 봄바람을 맞으며 꽃을 찾아다니는 벌 마냥 널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봄 비가 가랑가랑 내리기 시작한 오후, 너와 때늦은 약속을 잡고는 카페로 향하는 길이었다. 저 멀리 버스정류장 안으로 걸어가는 널, 빗방울이 우산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너의 발걸음을 뒤에서 바라보았다. 네가 걸어오는 한 걸음에, 나와의 거리가 줄어들 때마다 알 수 없는 희열이 느껴졌다. 마치 졸업장을 받기 직전인 아이 마냥 말이다. 날 발견하고는 미소 짓는 너의 얼굴은 칙칙한 도로변과 대비돼 단숨에 기분을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너와 마주한 채 즐겁게 대화하던 모습이 아직 내 머릿속에는 이토록 생생한데, 마주한 자리엔 넌 없고 나만이 홀로 있을 뿐이다. 여느 때와 같이 너와 만나던 카페에 앉아있으면 특별한 약속 없이도 말없이 네가 앉을 것만 같은데 말이다.
유독 너와의 기억 속에는 커피라는 매개체가 있었다. 거리를 걷다 주변 카페에서 퍼지는 커피콩을 볶는 향을 맡으면 문득 네가 떠오른다. 넌 유독 쓰디쓴 아메리카노를 좋아했었다. 어쩌다 에스프레소를 먹을 때면, 늘 나는 네게 물었었다. 의아함이 섞인 나의 물음에 넌 말없이 커피잔을 내게 건넬 뿐이었다. 널 만난 횟수가 늘어갈 때마다, 자연스레 그 쓰디쓴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양도 늘어갔다. 연인이 닮아 간다는 건 외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네가 내게 남긴 이 많은 흔적들이 네가 내 옆에 잠시 동안이라도 머물렀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워버린 사진, 잊혀져 가는 기억이 아니라, 내게 남아 있는 건, 닮아버린 취향뿐이다. 내 앞에 놓여있는 아메리카노의 고소한 향기만이 네가 나를 스쳐갔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스콜이 더운 열기를 식히기 위해 대지를 뒤덮고 있는 치앙마이의 어느 카페 안, 신호도 잡히지 않는 휴대폰을 애꿎게 만지작거린다. 너와 싸운 뒤에 떠난 여행, 마무리를 채 짓지 않고 퇴근한 것같이 뭔가 뒤숭숭하다. 영어라는 사투를 벌이고 나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널 만나기 위해서 지친 몸을 이끌고 학교로 갔다. 맑디맑은 하늘처럼 우리의 만남도 화창한 것 같았고, 어긋난데 없이 무난해 보였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뿐이었던 걸까, 헤어지기가 싫어 붙잡는 내 손을 냉정히 뿌리치는 네 손을 본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곤 쏟아내는 너의 울음 썩인 목소리, 평소 같았으면 널 달래기 위해 무슨 말이든 했을 텐데, 그 날만은 나도 널 이해할 수 없었다. 지친다는 말, 허망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널 나두고 홀연히 뒤 돌아섰다. 네가 앉아있는 벤치가 희미해질 무렵에도 넌 황망히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새벽녘 해가 채 나오기도 전, 기차로 돌아가는 길 안에서 네게 시간을 갖자는 문자를 보냈다. 이어지는 두 통의 전화, 도저히 받을 수 없었다. 우리의 대화 속에서 나는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전원을 꺼버리고 잠이라는 나만의 도피처로 숨어버렸다. 그로부터 몇 주의 시간이 흘렀고, 지쳐버린 몸은 서서히 회복되어갔지만 지쳐버린 마음은 시들어버린 꽃처럼 그대로였다. 짙은 녹엽이 온 세상을 덮고 있는 열대 지방에서, 네가 없는 이 공간에서, 우리 만남에서 ‘끝’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여행의 끝자락에 들어섰을 때, 네게서 전화가 왔다. ‘뭐해, 학교 언제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평소처럼 말하는 네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저 묵묵히 듣다가 고개를 끄덕이듯이 대답을 하는게 전부였다. 아침에는 무엇을 먹었고, 학기가 시작되면 이런저런 영화를 보자는 이야기, 평소와 다름없이 넌 내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이전과 다른 이질적인 무언가가 내포되어 있었다.
부산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청명한 하늘에 점같이 무수히 찍힌 비행기들은 바삐 자신만의 여정을 찾아 떠난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시간이 빠듯해 학교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널 만나기 위해,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길을 서둘렀다. 여름이 발걸음을 돌리지 않은 대구의 열기는 여전했다. 늘 가던 너의 화실 앞, 작은 벤치에서 널 만났다. 여행은 어땠었냐고 네가 조심스럽게 첫 마디를 내게 건넨다. 무덤덤할 것 같았던 심장이 맑고 청아한 네 목소리에 시계의 초침이 흐르듯 반응한다. 무언가를 확인하고자 했던 욕망도, 이 두근거림 앞에서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그 당시에 내가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았다. 밥은 먹었냐는 네 물음에 아직 못 먹었다고 답했다. 자주 가던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겨 자연스럽게 밥을 먹었고, 대화를 나눴다. 익숙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에 한편으로는 안도했지만, 다른 한편에선 무언가를 빼먹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학교 뒤편에 유명한 호두파이를 산 후, 네가 있는 화실로 향했다. 잔디밭, 이해할 수 없는 조형물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길이 오랜만의 발걸음을 환영해주는 듯했다. 화실 안, 짙은 묵선과 그늘진 곳에 말리고 있는 도선지, 재로를 준비하기 바쁜 학생들이 분주히 왔다 갔다 거린다. 그 곳에서 살며시 네 모습을 뒤에서 지켜 보왓다. 너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우리가 처음 만날 때 항상 짓던 너의 미소가 화폭에 그림이 그려지듯 자리하고 있다. 익숙한 모습. 너무나 그리웠던, 우리의 만남 속에선 더 이상 남아있지 않는 모습을 말이다. 너의 미소도, 나의 미소도, 너와 나 사이엔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밖에 없었다. 네게 파이만을 건네곤, 부끄러운 무언가를 보고는 못 본채 하는 사람 마냥 도망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고맙다는 말과 왜 그렇게 급하게 가냐는 네 말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는 거짓말을 남긴채 말이다.
화실에서의 그 일이 있고 나선, 마음 속에서 숨길 수 없었다. 우리의 만남에서 '끝'이라는 단어를. 어쩌면 그 싸움이 있은 후, 하루하루는 너와의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른 가을이 찾아왔을 무렵, 결국 난 그녀와의 만남에 마침표를 찍었다. 영화와 같았다고 믿었던 만남의 마지막은 낙엽이 떨어지는 밤, 네 집 앞에서였다. 네게서 만남을 승낙받았던 그 장소에서 난 네게 이별을 건넸다. 수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많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안했다기보다는 못했다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이었다. 너 역시도 알고 있었을 테다. 떨림보다는 의무감이, 행복 보다는 다툼이 잦았고, 기대 보다는 실망만이 가득했다. 예상했다는 듯이 끄덕이는 고개, 더 할 말이 남지 않아 뒤돌아서 앞만을 보고 걸었다. 어느 곳에도 눈동자를 고정시키 못한 채, 걷고 또 걸었다. 담담한 네 모습을 머릿속에서 되뇌이고 또 되뇌이며 말이다. 내 앞에서는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넌 마지막까지도 그랬다. 그 해의 가을은 유독 추웠다. 시간의 흐름이 텅 비어버린 너의 자리를 채우기에는 그 가을의 공동은 너무나도 컸다.
기적소리를 내며 열차가 정차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새벽 승무원들이 바삐 움직이며 이번 역에서 내려야 할 승객들을 깨운다. 짙은 어둠이 발걸음을 채 무르기도 전에 열차 안의 하루가 시작된다. 여기저기서 뒤척이는 소리에 잠이 달아난다. 뜨거운 김을 내뿜는 사모바르에서 커피를 받아와서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이 조그마한 공간 안에서 설명하려는 건 그녀를 추억하는 것도, 그리워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당시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날이 밝아오고 창틀 속으로 조금씩 환한 빛이 침범해오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득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놓는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조금씩, 한 걸음씩 나를 잠식해 갔었다. 네가 나의 영역을 들어와 범위를 넓힐 때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었다. 밤늦게까지 과제를 준비하고 들어가는 네가 걱정돼, 그 끝을 잠을 설치며 기다렸었다. 네게 '이제 끝났어'라는 연락을 받기까지가 너무 더디고 힘들었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널 보기 위해 외투를 걸친 채 찬 공기를 맞으며 화실까지 뛰어가는 순간의 환희도 너는 아마 모를 것이다.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모른다는 사람들의 말에도 '난 아니야, 내가 설마'라는 말로 짐짓 나를 판단했었다. 사람들의 흔한 부탁도 쉽게 거절하던 내가, 어느새 너의 한마디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었다. 너한테 만큼은 슈퍼맨이 되고 싶었다. 하나밖에 할 줄 몰라서, 널 위해 서면 다른 무언가를 포기해야 했음에도, 그 포기가 내겐 너무나 힘든 일이었음에도 난 너를 제일 먼저 생각했었다. 너에게 만큼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충실했고, 그 순간만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