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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WER Jan 12. 2018

그 기분, 그 곳, 짧은 단편


조각 하나.  

익숙한 기분에 이끌려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길을 걸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내가 걷는 이 길이 내가 가려는 목적지에 닿을 수 있는 길인지는 말이다. 그래도 익숙했다. 한 번쯤은 봤을 것만 같은 나무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고, 산뜻한 내음은 내 기억보다 더 선명히 나를 이끌었다.


"아빠 여기가 아니야."

아들이 옆에서 말했다. 작은 손 하나를 쭉 뻗어 내 팔꿈치 바로 밑을 움켜쥔 채 아들은 나를 놓칠세라 부지런히   쫓아왔다. 이제 겨우 아홉 해를 넘긴 아이의 이마에는 이미 땀방울이 가득 맺혀있었다.

"무슨 소리니?"

아들을 내려보다가, 땀방울을 소매 끝으로 닦아주며 말하자 아들은 눈을 초롱하게 뜨고는 힘차게 말했다.

"옛날에 나 여기 와본 적 있어! 아까 저 나무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야 되는데, 아빠는 계속 앞으로만 걸었어"

아들이 조그마한 손으로 가리키는 나무를 돌아보자, 왠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작은 나무들에 둘러싸여 서있었다. 백 년은 족히 돼 보일 만큼 키가 컸다. 분명 아들이랑 여기를 마지막에 왔을 때가 사 년 하고도 육 개월 전이다. 그때 아들은 내 품에 안긴 채 들려져 이 길을 걸었다. 유치원에 보내달라고 떼를 쓰던 아이가 이 길을 기억할리가 없었다.


"확실하니?"

"응!"

아들의 표정은 이미 자부심으로 가득 차보였다. 단 한 번도 아이가 이겨보지 못한 아빠에게 첫 승리를 쟁취해낸 표정이었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데 속는 셈 치고 아이를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방향을 돌려 아이가 말했던 나무로 발걸음을 돌렸다. 나무에 서자, 이번에는 아들이 먼저 종종걸음을 내딛으며, 나를 이끌었다.

"저기야 저기"

한 오분쯤 아이의 뒤를 보며 우거진 숲을 헤치자, 아이가 저 앞쪽에서 소리를 질렀다. 아이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정확히 한 봉오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이의 손만큼이나 작은 한 봉분이었다. 여름날의 무성한 태양을 그대로 흡수했는지 주변은 온통 잡초들이 울거져 있었다. 그래도 봉긋 튀어 오른 작은 언덕배기는 선명히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무덤. 그렇다 무덤이었다.


"아버지 저 왔어요. 미안해요. 이번에도 너무 오랜만이네요."

온몸에 쌓여있던 죄송함이, 아픔이 한꺼번에 눈동자로 맺혀왔다. 생전 단 한 번도 나를 꾸짖지 않은 아버지여서 더 죄송스러웠다. 분명 지금도 괜찮다고 말하실 터였다.

"아빠 왜 울어. 울지마"

아들이 다가와 내 왼팔 끝을 잡고 힘을 준다.

"아버지. 그래도 나 한 번도 안 울었어요. 사 년 전에 여기서 울고, 처음으로 우는 거예요. 나 맨날 아빠 앞에서만 울어잖아요. 지금도 그래요. 저 어디 가서 안 울어요. 그러니깐, 오늘은 실컷 울래요. 나 너무 힘들었단 말이에요. 정말로 아빠 미안해요"

흐느낌이었을까. 부르짖음이었을까. 어쩌면 딱 그 중간을 달리는 울음소리가 숲 속을 메웠다. 시원한 들바람도 눈동자에 맺힌 눈물을 말리기에는 조금 역부족이었다.


조각 둘.

급히 전화를 받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새벽 1시, 겨우 버스터미널에서 마지막 버스를 예매하고 부리나케 버스를 타고나서야 조금씩 주위가 눈에 들어왔다. 이상한 자국이 묻은 와이셔츠, 검은 정장 바지에 검은 구두,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입은 옷이었다. 전화를 받은 건 회사에서 퇴근 한 뒤, 친한 상사의 권유에 못 이겨 술을 한 잔 하고 들어가던 택시 안이었다.

"여보세요? 어 형, 무슨 일이야. 어. 어.... 지금 갈게. 바로 갈 수 있을 거야."

택시 기사가 어두워진 내 표정을 미러로 훔쳐보다가 아무 반응이 없자 말을 걸었다.

"손님. 무슨 일 있으세요?"

"신사 말고 버스 터미널로 가주세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슨 기분인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멍멍했다.

'아버지가 사고가 나셨어. 어어, 좀 위독하시데. 바로 내려와야 될 것 같아.'

형은 항상 당당한 사람이었다. 나도 아버지도 그리고 형도 모두 밑바닥에서 시작한 삶이었고, 바닥에서 정상을 탐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당당했다. 그런 형의 목소리가,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만큼 떨고 있었다. 백 마디 말보다 그 떨림이 내게 세상에서 느껴보지 못한 공포감을 두려움을 주었다.


부산까지 4시간 30분이나 걸릴 것이었다. 무엇을 해야만 할까.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나. 아니면 형에게 확인 전화를 해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지.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뭔가를 한다면 그 공포감이 사실이 될 것만 같았다. 잠도 잘 수 없었다. 밖도 볼 수 없었다. 그냥 꼼짝없이 나는 그 공포감과 두려움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야지 아무것도 확정하지 않을 수 있다. 아버지는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것이어야만 했다.


형이 보내준 문자로 보내준 주소를 택시기사에게 내밀었다. 다행히 아직 병원이라고 적혀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이미 해가 뜨기 시작하고 있었다. 곧바로 병원 문을 젖히자 형이 서있었다. 내가 이 시간에 올 것처럼 형은 앉지도 않은 채 굳건히 서있었다. 원래 내가 알던 그 냉정함을 되찾아 있었다.

"미안하다."

"왜. 왜 미안한데 아빠는 어디 있는데.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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