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만 해서가 아니라 먼저 믿어야 하는 신뢰

관계에서의 성숙

by 노샘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신뢰가 어떻게 생긴다고 생각할까? 일반적으로 상대가 어떤 일에서 긍정적인 결과나 태도를 보여줄 때,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닌 반복해서 보여줄 때, 상대에 대해 ‘저 사람 신뢰할 만하다’라는 평가를 하게 된다. 이를테면, 직장에서 어떤 프로젝트를 함께 수행할 때, 상대가 맡은 일을 기한 내에 빠뜨림 없이 마무리할 때, 혹은 나의 비밀을 털어놓았는데, 상대가 그 비밀을 굳게 지키면서도 여전히 나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없는 모습을 볼 때, ‘신뢰’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즉, 신뢰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 행동이든, 태도든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어야 비로소 신뢰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건적 신뢰’이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뢰의 개념이다. 그런데 인간관계에서 한 가지 더 알아두어야 할 신뢰의 개념이 있는데 바로 ‘무조건적 신뢰’이다.



‘무조건적 신뢰’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믿을 만해야 믿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과 함께 무턱대고 믿으라는 말이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편해도 해야 한다. 내가 느끼는 불편감과 관계없이 이것은 꼭 필요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내가 노력해야 하는 지점이다.



신뢰(信賴)의 한자어를 보면, ‘믿을 신’, ‘의지할 뢰’를 쓴다. 본래의 의미는 ‘믿고 의지한다’라는 뜻이지만, 조금 비틀어 해석해 보자면, ‘믿는 것을 의지한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믿는 것을 의지한다는 것은 믿음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그 믿음을 잃지 않겠다는 각오와 의지의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무조건적 신뢰’는 정말로 상대에 대해 어떠한 조건도 요구하지 않고 상대를 믿어주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무조건적으로 믿으라는 말이 상대방이 보여주는 온갖 문제 덩어리에 실망스러운 모습 그 자체를 믿으라는 말은 아니다. 믿어야 하는 것은 현재 나타나고 있는 문제의 현상 이면 감추어져서 잘 보이지는 않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그 사람이 가진 원래의 힘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가지고 있는 근본적 특성을 믿으라는 말이다.



인본주의 심리학의 창시자이자 현대 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칼 로저스(Carl R. Rogers)는 인간은 누구나 자기실현의 경향이 있다고 밝혔다. 즉,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 있더라도 사람은 스스로 성장하려 하고, 또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아주 능동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내가 로저스의 사람에 대한 철학을 가장 깊이 깨닫게 된 것은 바로 자녀를 키우면서이다. 아이의 성장과정 매 순간이 스스로 성장하려는 의지와 잠재력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는데, 특히 가장 극적으로 느낀 것은 걸음마를 시작하는 시기였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내가 아이에게 걸으라고 요구하지도, 걷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스스로 걸으려 하고, 그 과정에서 넘어지고 울음이 터지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시키지도 않았고,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왜 일어서서 걸으려고 할까?



사람이 바로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로저스가 말한 것처럼 사람에게 자기실현 경향이 있으니까 자신이 성장하는 방향을 향해 스스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아이가 걸을 때 나는 무엇을 했을까? 물론 곁에서 손을 잠깐씩 잡아주기는 했지만, 아이가 걷는 것에 있어 내가 특별히 역할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지는 않았다. 그저 곁에 함께 있었다. ‘과연 이번에는 걸음을 옮기는 것에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기대 속에서 곁에 머물러 있었으며, 걸음을 내디뎠을 때에는 크게 기뻐하며 소리치고 웃고 박수 쳤고, 넘어졌을 때는 ‘할 수 있어, 힘내’라고 격려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곁에서 함께하며 믿어준 것.



바로 이것, 스스로 더 나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신뢰하는 것, 이 무조건적 신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이 너무 급하다. 마음이 급해서 상대의 실수나 잘못 앞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처럼 굴 때가 많다. 물론 정말로 크게 문제가 될 때도 있겠지만, 마치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듯 과장되게 받아들일 때가 많다. 유아기의 자녀가 남들만큼 발달이 빠르지 못하거나 학령기의 자녀가 학업 성취도가 떨어질 때, 배우자의 잦은 실수를 마주할 때, 직장에서 새로 온 직원이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를 낼 때 등 여러 실수나 잘못 앞에서 우리는 마음이 급하여 상대를 신뢰하지 못한다.



‘Haste makes waste.’ 서두르면 시간이든, 돈이든 어떤 것이든 더 낭비가 된다는 미국의 속담이다. 급한 마음에 눈앞의 문제만 바라보면, 그 사람이 가진 근본적인 힘을 볼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면 또 계속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속도를 늦추고 잠깐 멈추어서 그 사람이 가진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와 잠재력을 바라보자. 그리고 그것을 먼저 믿고 그 믿음에 의지해서 기다려 주자. 그러면, 어떻게 될까? 무조건적 신뢰를 경험한 상대방은 나아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조건적 신뢰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신뢰는 상대가 이미 신뢰할 만 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먼저 건네야 하는 선물이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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