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사만다>. 8

너를 안아

by 샤골


날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머리를 묶던 윤서는

말없이 들어오라 손짓했다.

그녀도 나처럼 취기가 오르고 노곤해 보였다.

이전까지 내내 전해지던 분위기와 달리 다소 무표정한 얼굴.

그러나, 환대가 아닐지라도 난 초대를 받았다.

더 망설일 이유는 없다.


일시에 진공 속으로 진입한 듯 에워싸는 고요함과

외부와 확연히 구분된 습도까지,

이곳이 다른 층위에 있는 것처럼

나라는 이방인을 낯설어하는 듯했다.

나는 천천히 신발을 벗으며 서로가 적응할 시간을 가졌다.


다른 집에서 건너오는 소리까지 틈입하자

이 적막을 덮으려는 듯,

윤서는 창문을 열고 스탠드형 TV를 켜 음악을 틀었다.


스튜디오 스타일의 원룸 구조라 가구의 윤곽이 다 드러났고 생활의 흔적이 과하게 튀지 않는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내 책상처럼 열려 있는 노트북이 희미한 불빛을 냈다.

싱크대에는 아직 씻지 않은 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반듯이 개어둔 수건이 걸려 있었고

창가에는 작은 난초 화분이 어두운 실루엣으로 서 있었다.


이 집은 시각적으로 단정했다.

그만큼 냄새도 비워져 있었다.

집 안에는 도드라진 여자의 향이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그녀의 생활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 같았다.

비밀을 숨기지 않는 간결한 방식으로 살아온 흔적이 서려 있는 윤서의 집이 조용히 내 눈에 들어왔다.


윤서는 가볍게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냉장고에 간단한 거 조금씩 있어요. 라면은 제가 끓일게요.”


나는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숙취해소제를 먼저 꺼내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었다.


“피곤해요?”


대답을 기다리는 질문 같지 않았다.

오히려 내 생각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처럼 고개를 약간 기울였을 뿐이었다.

그 순간, 내 안에 있던 작은 망설임이 소리도 없이 무너졌다.


“칫솔 남는 거 있어요? 날이 바뀌었으니 양치 한 번 하는 게 좋겠어요. 술만 사고 칫솔 생각을 못 했네.”


윤서는 별다른 대답 없이 욕실에 가서 새 칫솔을 꺼내와 건넸다.

투명 비닐에 곱게 싸여 있던 그것을 받아 들며,

나는 그 단정한 준비성이 그녀의 일상 깊숙이 스며 있다는 것을 느꼈다.


샤워도 하고 싶었지만 갈아입을 옷도 없고

씻는다는 행위를 벗어난 의미로 보일까 봐 마음을 접었다.

세면대 앞에서 양치질을 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거울 너머로 낯선 집의 공기와 내 얼굴이 겹쳤다.

취기와 긴장, 그리고 한편으로 밀려드는 기대감이 내 얼굴을 다른 표정으로 바꿔놓았다.


세수까지 하고 손등에 남아 있던 물을 털고 나오자

잔불 위에서 라면 냄비가 조용히 끓고 있었다.


윤서는 젓가락을 든 채 멍하니 물결을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천천히 돌렸다.

수증기에 번져 가는 주방등 때문인지,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젖어 보였다.


“더 끓어야 하는데…”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웃었다.

라면 봉지는 여전히 테이블 위에 봉인된 채였고

윤서는 인덕션의 전원을 껐다.


내가 사 온 소주와 안주가 될 만한 것들을 미리 꺼내 준비해 놓고 찬장에서 잔을 꺼내온 윤서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


“앉아요, 민호 씨.”


감각이 무뎌진 탓인지 그녀가 병뚜껑을 열고 나와 자신의 잔에 조르르 소주를 따르는 모습이 느릿느릿 내 앞에서 펼쳐졌다.


지금 지도에서 내 좌표를 찍어 보라고 하면,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냥 내 앞에 한 여자가 있고 그것이 내 위치를 명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단서였다.


TV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은 이제 배경을 잃은 듯 멀리서 웅얼거렸고,

작은 난초 화분은 그 여백을 지켜보는 침묵의 증인처럼 서 있었다.


윤서가 천천히 눈을 뜨고 시선을 나에게 고정했다.

날 지긋이 바라보다가 뒤이어진 윤서의 말은 뜻밖이었다.


“계속 느껴지는 건데, 민호 씨 목소리가 좋아요.

말도 잘하고.. 얘기하는 게 꼭, 진행은 느리지만 흥미가 떨어지지 않는 소설 같아.”


난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렇죠, 제가 대화 상대로는 꽤 높은 점수를 받아왔어요.”


“뭐예요, 왜 선을 그어? 나랑 말만 하고 싶어요?”


민호는 잠시 잔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듯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하지만 내가 보이는 것 말고 뭐가 더 있다는 기대는 하지 말란 얘깁니다.

윤서 씨 정도면 이미 그러고 있을 테지만.”


소주잔을 들어 내 쪽으로 가볍게 부딪쳤다.

술방울이 튀었는데, 닦지도 않고 웃었다.


“에이, 그런 게 어딨어?

그런데요, 민호 씨… 이상하게 편하네요.

집에 들이기엔 이르기도 하는데… 마음이 편해요.

그런데 편한 게 다는 아니잖아요?

나 지금… 긴장돼요.”


나는 웃으며 잔을 비웠다.


“오늘 같은 걸 먹어서 그럴까요?

저도 증상이 비슷해요. 술 때문이겠지만…”


그녀가 젓가락을 집어 탁자 위를 두드렸다.


“아니요. 술은 그냥 핑계예요.

원래 술은 실컷 바람 집어넣고 옆에서 구경만 해요.

뭘 해결해주질 않아.”


나는 그녀의 눈길을 피하지 못하며 덧붙였다.


“그럼 지금은?”


윤서가 잔을 내려놓으며, 조금 웃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은… 난 어떤 핑계도 대고 싶지 않아요.

지금부터 우리에게 최악의 밤이 찾아온다고 해도,

다른 걸 들이대면서 변명하지 않을 거야.”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가 턱을 괴고 날 바라봤다.

사람 눈을 오래 쳐다보지 못하는 내가,

눈앞의 촉촉한 우주 속으로 저항 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민호 씨는 참 느리게 말하는데…

그래서 더 붙잡고 싶어 져요.

놓치면 오래 생각날 것 같아서.”


나는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윤서 씨는 빨라요.

너무 빨라서 내가 자꾸 그 뒷모습만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신경 쓰여요.”


그녀가 몸을 숙여 내 쪽으로 다가오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내가 한 바퀴 앞질러 돌아올 때, 날 잡아요.

우리 둘은… 딱 맞게, 다른 거예요.”


윤서가 잔을 비울 때마다

유리잔의 가장자리에 남은 물기가 그녀의 입술 선과 묘하게 겹쳐졌다.

대담한 웃음 뒤로 남은 흔적마저 그녀의 것이 되는 듯했다.


나는 무심한 듯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는 데에는 늘 한 박자 늦었다.


식탁 위의 안주는 거의 손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더 이상의 식욕이 있을 리 없었고 눈이 따가워져 왔지만 술잔이 오가는 리듬은 유지되었다.


때때로 윤서는 젓가락으로 안주를 툭 건드렸지만

그냥 다른 얘기를 꺼내기 위한 예비동작처럼 보였다.


“라면 먹어야죠?”


내가 바로 답을 않자, 말이 필요 없다는 걸 아는 듯 그녀가 주방으로 몸을 옮겼다.


윤서는 아까 올려두었던 냄비에 불을 넣었다.


그녀가 라면 봉지를 만지작거릴 때

나는 테이블에 라면 냄비를 올려놓을 공간을 만들기 위해 작은 접시들을 정리하며

‘기어이 라면을 먹게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때, 어느새 다가온 그녀가 나와 테이블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내 무릎 위에 앉았다.


짧고도 단호한 동작이었다.


우리는 얼마간 눈을 맞추고 더 이상의 말은 오가지 않았다.

잔잔한 숨결, 스치듯 겹쳐진 입술 사이로 아직 닿지 않은 갈망이 서성였다.

그리고 그 공백이,

무엇보다도 관능적인 초대가 되었다.


전신으로 느껴지는 윤서의 굴곡진 촉감.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고 싶은 내 충동이 번져가며 겹겹이 포개져 간 우리의 열기가 방 안을 채워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