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붙잡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죄를 묻기 위해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 앞에 세웠다. 총독인 빌라도는 죄가 없음을 확신했다. 그래서 풀어주려 하였지만 무리들의 목소리에 그의 목소리는 힘없이 묻히고 만다. 그런 후 무리들의 요구는 더 세게 휘몰아쳤다. 그래서 예수님의 죄 없음을 알고도 자신의 편의를 위해 무리들과 정치적 타협을 하게 된다. 불의를 알면서도 예수님을 희생시키고 자신의 정치적 안위를 택한 것이다. 그로 인해 사도신경에는"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구절이 기록되어 읽히고 또 읽히는 수치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당시에는 로마제국이 지배하는 시기였지만, 로마 총독을 향한 무리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결국 그들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결국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라는 짧은 문구는 정의가 불의에 굴복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만약에 어떤 사건이 발생되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자. 특히 그 대상이 부자와 가난한 자이다. 부자의 손을 들어주거나 가난한 자의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부자의 손일까? 가난한 자의 손일까?
이것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손들어 줘야 할 대상이 부자도 가난한 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옳은 사람의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 정당하지 않고 올바르지 않은 것들에 대한 죄의식이 사라져 가는 시대이다. 잘못했으면 잘못한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잘하면 잘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그 당연한 것이 힘의 논리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안타까워 한다. 그래서 한계에 도달했고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 최근에일어 난 시민의 목소리인 것이다.
[무리와 시민은 다르다]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것이 부정되고 은폐될 때 우리가 세운 민주주의의 깃발은 찢어지고 변색되고 마는 것이다. 어떻게 세워 온 깃발인데 특정인의 전횡과 횡포와 무지에 의해 무너지고 퇴보하는 것을 볼 수 있겠는가. 그 잘못된 길을 막아서는 것이 시민의 힘이고 광장의 힘이다. 정치적 타협은 정치인만의 몫이 아니라, 시민과 정치인의 몫이어야 한다. 그 선택에는 반칙과 특권이 없어야 하고 올바른 원칙이 기반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라는 짧은 문구는 불의를 굴복시키고 정의가 승리하게 만든 사건이다.
[정원까지 울린 광장의 소리 - choi]
그들의 소리는 분명히 다르다. 그들이 무리가 아니라 생각이 있는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지식의 쇠퇴-오마에 겐이치]에 등장하는 "B층"(구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인기나 분위기만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세상이었다면 역사는 후퇴의 전철을 밟았을 것이다. 무리가 아닌 시민의식의 성장과 결집이 다양한 목소리를 하나의 주제로 담아낼 수 있었다. 고치고 수정하는 것이 수사 조서에만 국한되지 않고, 잘못된 관행과 잘못된 생각이었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라는 안타까움만이 깃들 뿐이다.
[이제는 이겨야 한다]
대의 민주주의는 선거로 결정하게 되어 있다. 다수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 시민에게 신뢰받게 되는 것이고, 다수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권한을 갖게 되는 것이다. 대통령도 국회도 권한만이 아니라 신성한 책임도 함께 부여된다. 이 신성한 책임의식을 인지하지 못하고 달콤한 권한만을 눈에 집어 넣으니 책임은 멀어지고 권한의 지팡이만 휘두르게 되는 것이다. 휘두르라고 지지를 한 것이 아니라 봉사하고 헌신하라고 지지를 보낸 것인데 말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제대로 투표해야 한다. 참정권을 올바르게 행사하는 시민의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때이다. 진보와 보수의 낡은 프레임이 아니라 용광로 속에 집어 넣어 통합하고 융합해서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내는 시대적 능력이 요구되는 때이다. 작은 생각들이 모여서 큰 물결을 이루어 낸다. 비난과 비판이 아니라, 건설적인 미래상을 그려나갈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한 싯점이다. 다가 올 미래를 지배하고 이끌어 갈 능력은 리더를 제대로 선출하는 성숙된 시민의식에서 출발됨을 꼭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