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새하얀 백지 한 장이 주어졌다. 어떤 그림을 그릴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 꿈 많던 청년시절이 회상되지만 지금은 그저 막막할 뿐이다. 신준모의『어떤 하루』에서 "막막하다고 느껴질 때는 막, 막 해보는 거야"라는 말처럼 도전이 필요하지만 용기가 없다.
그릴 것이 많아서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그릴 것이 없어 걱정이다. 꿈도 한때의 풍요였던가? 언제나 새하얀 백지는 주어진다. 조금 때 묻고 조금 감춰진 이면은 존재하지만 그래도 새롭게 그림 그릴 시간과 공간은 있다. 우리가 다른 유혹거리에 현혹되거나 그저 결정을 못해 머뭇거리는 시간에도 말이다.
딸에게 물었다.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이 있냐고? 딸은 명쾌하게 없단다. 불분명해서 자기도 모르겠단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라는 생각을 하며 다양한 경험을 해 보라고 조언하는데 그치고 만다.
다시 아들에게 물었다.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이 있냐고? 아들은 많단다. 축구선수, 복싱선수, 소방관, 유도선수... 운동하는 것이 좋은가 보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라는 생각과 함께 열심히 해 보라고 조언했다.
딸과 아들에게 하얀 백지를 주면 과연 무엇을 그릴까? 궁금해졌다. 궁금하면 참을 수 없다. 확인해 봐야 한다. 그래서 백지 한 장을 주었다. 너희들 안에 담겨 있는 마음속 그림을 그려 봐!
딸의 꿈은 난해하다. 동물을 수호신으로 삼고 하고 싶은 것을 그렸다. 답답했나 보다. 무엇이 되기보다는 그냥 현실에서 벗어나 즐기고 싶다는 표현이다.
아들은, 중학생이 되니 현실의 벽 앞에서 꿈도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꾸준한 한 가지는 남아있다. 슈퍼맨 같은 경찰관이 되는 것이다. 정의의 사도가 되어 누군가의 힘이 되겠다는 마음이 가상하다. 어떤 모습으로 성장할지 모르지만 어느 분야에서든 슈퍼맨과 같은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면,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여전히 새하얀 백지 안에서 헤맨다. 그릴 그림이 없어 빈 광야에 서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방향을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두려움이 엄습해 오고 빈 공간이 시커멓게 멍들었다. 방향을 잃은 것이 두려움의 실체이다. 그 두려움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소멸되지 않고 시커먼 멍이 되어 돌아온다. 작은 점이 큰 멍이 되고 큰 멍이 눈 앞을 가린다. 멍 앞에 내 실체는 없다. 다만 눈 앞을 가린 시커먼 덩어리가 닥쳐 올 미래의 아픈 현실이 될 뿐이다.
하얀 백지 위... 그려야 하는 그림에 점점 더 절박함을 느낀다. 쉽게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부럽다. 그들에겐 그냥 재능이 주어졌을까? 아니면 부단한 노력의 결과물일까? 노력 없이 성취도 없다지만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위로한다.
가끔은 너는 이 일만 해! 라며 태어날 때부터 정해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