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는 Reset이 없다

(따쭌) 글을 디자인하다 - 010

by 글 쓰는 나그네

[일에 지치다]

컴퓨터 사용이 일상이 되었다. 예전에는 컴퓨터 1~2대를 놓고 직원들이 순번 정해서 돌아가며 사용다. "왜? 너만 그렇게 오래 하니?"라는 불만도 있었고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도 적었다. 상사가 연필이나 볼펜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면 타이피스트가 되어 열심히 똑같은 글자를 만들어 갔다. 거기엔 나의 생각은 없고 단순히 똑같이 베끼는 것에만 집중했다. 지금은 타자기 시대에서 컴퓨터의 시대로 급속하게 변한 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타이피스트라는 이름의 의미도 존재감도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짧은 순간, 수많은 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사람도 지치지만 컴퓨터도 지친다. 가끔은 먹통이 되기도 하고 느려 터져 속앓이도 하게 만든다.


이럴 때 하는 일이 대부분 'Reset'이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고 가장 익숙한 방법이다. 또한 대부분은 Reset 한 번에 해결된다. 지나간 기억은 지우고 아무 일 없었다는 새로운 화면을 제공한다. 또한 일에 쌓인 무게를 덜어내고 스스로 가벼워졌기에 가벼워진 몸으로 열심히 돌아다닌다. 컴퓨터 본체보다 마우스가 더 신난 듯이. 가끔은 너무 잘 미끄러져 되돌리기에 벅차기도 하다. 그런데 체력이 떨어지고 일의 무게에 쌓이면 또 버벅거리며 먹통이 된다. 그러면 다시 Reset을 무한 반복하게 된다.

[삶에 지치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없던 일처럼 깨끗이 지우고 새롭게 시작하는 Reset 기능이 없다.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 삶의 무게이다. 그 무게에 강하게 억눌려 있다. 가장(家長)의 무게와 일의 무게 그리고 관계의 무게가 얽히고설켜서 스트레스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 풀어야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 풀지 못하니 쌓이고 쌓이다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옷을 벗으려면 옷고름을 풀고 원수와 다시 친해지려면 마음을 풀고, 원한을 풀고, 코가 막히면 코를 풀고, 맺히고 뭉치고 얽혀 있는 모든 것을 풀다가 나중에는 심심한 것까지 다시 풀어 '심심풀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낸 한국인!

서양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어텐션(attention)'의 차렷 자세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하려면 몸부터 풀어야 합니다."
[길을 묻다 - 이어령]

이렇게 풀어야 하는데, 푸는 방법 중에 가장 좋은 것은 쉼이다. 자신의 체력보다 과하게 버거움을 느낄 때, 풀지 못하고 쌓여만 갈 때,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쉬어야 한다. 그 쉼을 통해 기능이 회복되고 수명이 연장된다. 즉, 잘 쉬는 것이 Reset으로 지우는 것보다 더 나은 해결책이다.


[이야기로 풀다]

쉼 이외에 또 다른 해결책은 속마음을 푸는 것이다. 속 마음을 풀려면 대화할 상대가 필요하다. 이 대화가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것이고 결국은 이 나눔이 삶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시름은 술로 풀고 구구절절한 삶의 애환은 이야기로 푸는 법이다."
[시가 있는 밥상 - 오인태]

이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 시름은 풀고 삶의 애환은 녹이고 단절된 관계를 잇는 가교 역할이 이야기에서 나온다. 신경망처럼 사람의 관계도 삶의 애환도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연결망이 훼손되었다고 삭제하거나 지워서는 안 된다. 하나하나 찾아서 이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막힌 길을 뚫고 끊긴 다리를 이어 더 나은 삶의 이야기로 길을 열어가야 한다. 공기의 저항을 뚫고 새가 하늘을 날 듯이 말이다.


[가슴으로 풀다]

세상이 점점 각박해지고 있다고 한다. 먹는 것과 입는 것들은 참 많이 풍족해졌는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비판적으로 변하고 있다. 삶의 만족감은 점점 낮아지고 그 자리를 욕심으로 채가고 있다. 그 욕심들이 사람의 마음을 멍들게 해서 각박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이 무엇인지 아는가? 겉으로는 숨을 쉬며 살아가지만, 가슴과 영혼은 숨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

보이는 겉모습은 화려해졌지만, 속 사람은 피폐해지고 있다. 삶 속에 내가 아니라 다른 이를 바라보고 비교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숨은 쉬지만, 가슴과 영혼은 숨을 거둔다고 말하는 것이다. 첨단 기기와 프로그램들로 문명은 대체되고 있지만, 기계가 낼 수 있는 소리가 있고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소리가 있다.

기계의 차가움을
사람의 따스함으로
채워나갈 때

삶의 이야기가
풍족해지는 것이다.

이 따스함에는 가슴이 전해주는 온기를 품고 있어야 한다. 사람의 온기가 향기로 덧입혀질 때 작은 불씨가 태양처럼 뜨겁게 빛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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