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기간이 다가오면서 아들의 공부 스트레스가 심해졌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뭘 하면서 스트레스라도 받아야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스트레스만 받는 것 같다. 그래서 가끔 한마디씩 하게 된다. 부모의 당연한 의무이고 권리를 행사한다고 생각한다. 그 부모라는 이름에 책임이라는 단어가 함께 공존한다. 올바르고 훌륭하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갖고 있다. 그 마음이 기준점이 되면 하나의 잣대로 형성된다. 그 잣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눈에 차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될 때, 지적하게 된다. 이 지적의 말투가 반복되고 훈육하는 마음이 깃들면 잔소리가 된다.
잔소리하지 않는 부모도 없겠지만, 잔소리 듣기 좋아하는 자녀도 없다. 수없이 말하고 듣는 잔소리이지만, 왜 잔소리일까? 라는 궁금증에 어원을 찾아봤다. 잔소리의 어원은 ‘잔(‘가늘고 작은 ‘또는 ‘자질구레한 ‘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소리‘ [출처 - 국립어학원 표준국어대사전] ‘쓸데없이 자질구레한 말을 늘어놓는다‘는 말이다. 어원과 뜻에서도 이러니 듣기 좋은 아이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잔소리도 다른 아이에게는 관대해진다. 잘 못 하는 모습이 보이더라도, 지금의 네 모습이 아니라 미래의 네 모습에 귀 기울이라며 따듯한 말로 표현한다. 그러보 보니 부모의 입장과 어른의 입장은 틀리다. 내 아들, 내 딸이라는 틀에 가두게 되면 항상 부족하고 항상 열등해 보인다. 장점은 무수히 많은 데 단점만 부각하며 강조하게 된다. 지난번 시험 결과를 보고 아들에게 물었다.
"수학은 학원 다니면서 성적이 왜 이래?"
"아빠는 항상 잘한 과목은 얘기하지 않고 못한 과목만 지적해요."
"그러면 다른 과목은 잘했다고 생각하니?"
"아빠는 무조건 90점 이상은 넘어야 잘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 정도는 돼야 잘한 것 아니니?"
"반에서 90점 넘는 얘가 몇 명 안 돼요. 아빠의 기준이 너무 높아요."
"다른 애들이 왜 중요하지. 네가 거기에 들면 되잖아?"
"사람은 다 다르잖아요. 공부 잘하는 친구가 있고, 나처럼 운동 잘하는 친구가 있잖아요. 사람마다 다 잘하는 게 틀린 데 너무 공부만 얘기하잖아요. 세상에 공부만 잘하는 사람만 있으면 되겠어요."
"그래도 학생인데, 학생의 기본은 공부잖아. 너의 미래를 생각해 보렴. 더 많은 기회의 창이 열리잖아"
"아빠도 공부 못 했다면서요. 그러면서 왜 나에게 공부 잘해야 한다고 그래요"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너도 부모가 돼봐라. 이런 얘기 안 하게 되나?"
항상 끝맺음이 좋지 않다.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공부, 성적에 관한 대화를 하다 보면 논쟁만 가열된다. 아빠와 아들은 죽을 때까지 경쟁 상대라고도 하지만, 한번 시작하면 서로 상대에 지지 않으려는 습성이 강해진다. 아들도 예전의 아들이 아니다. 순종적이며 고개 숙이던 모습에서 투사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잣대와 기준 그리고 불합리하다 생각되면 반박한다. 나름 논리도 조금씩 갖춰져 있다. 살짝 언짢아지는 요소도 있지만, 대화의 희열은 느끼게 된다.
가만히 지켜만 봐라
이전에는 단편적인 질문과 답변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왜? 라는 의문과 함께 부당하다 생각되는 것에 대한 분노를 느낄 줄 안다. 분노를 느끼는 나이이고 또한 올바른 방향이다. 성장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불에 데고도 뜨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삶은 죽은 것이다. 분노할 때 분노하고 차가워야 할 때 냉철해져야 한다. 그 깊이와 때를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시기이기에 분노하며 때로는 냉철해지는 과정을 부딪치며 배우고 익혀야 한다.
내 아이를 대하는 방법도 부모의 관점에서 어른의 관점으로 변해야 한다. 어른의 관점에서 보면 한없이 너그러워진다. 청소년 시기 다양한 삶의 때를 묻혀보았기에 이해와 공감이 바탕에 깔려 있다. 다만 내 아이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려는 습성이 이것을 누르고 있을 뿐이다. 잘못을 지적하는 방법은 훈계보다는 조언이 낫고 조언보다는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더 낫다. 열정적 설교보다 때로는 침묵이 더 좋은 대화일 때가 있다. 여기에 공감하는 능력이 있다면 공감적 리액션을 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요즘 아들에게 말하는 것도 점점 조심스러워진다. 훈육이 필요할 때 첫마디를 어떻게 할까 고민한다. 될 수 있으면 바로 내뱉지 않고 뜸을 들이고 일상 속 다른 관심사로 먼저 분위기를 완화한다. 그다음에 이유를 묻는다. 이제는 내 아이지만 내 것이 아니다. 내 소유가 아니라 한 명의 인격체로 받아들이고 대접해야 한다. 자녀를 소유의 개념으로 알고 있는 부모들이 여전히 많다. 내 자녀인데 어긋나고 말 듣지 않으니 더 화가 나는 것이다. 칸트가 말한 정언명령처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 자녀는 부모가 원하는 도구가 아니다. 수단과 목적이 뒤바뀔 때 감정에 트러블이 발생하게 된다. 부모의 꿈을 이루고 위엄을 지켜주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스러운 하나의 인격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일이 지나고 모레가 지나면 또 쓸데없는 자질구레한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계속하게 되는 이유는 Brake가 없어서이다. 아마도, 하나님이 잔소리에는 Brake를 달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잘 멈출 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