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허물면 길이 된다>
요즘 아들이 방황하고 있다. 사춘기를 쉽게 넘기나 싶었는데 중3에 접어들며 생각이 많아졌다. 아들 방만 들어서도 복잡한 마음이 읽힌다. 부지런하고 깔끔한 성격은 없어지고 게으르고 지저분한 모습으로 변했다. 달라진 일상은 매일 아침 엄마와 다투며 하루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일어나라. 씻어라. 학교 가라. 점점 얕은 담장이 높은 벽이 되어 가는 느낌이다. 대화도 단답형에 가깝고 불편한 감정도 툭 튀여 나온다. 그러면 듣고 있던 나도 잠시 숨을 고르다 어느 한순간에 폭발한다.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다. 눈물을 쏙 빼놓을 만큼 혼내고 나면 또 후회가 밀려온다. ‘왜 그 순간을 참지 못했을까?’
아들 앞에 큰 벽이 세워지고 있다. 그 벽이 신기루처럼 보였다가 흩어지리라 믿는다. 다만 자신을 세우는 벽이 아니라 단절을 의미하는 벽이 된다면 흩어지기 쉽지 않다. 더 단단하게 굳기 전에 빈 틈을 통해 숨구멍을 만들고 스스로 벽을 낮추도록 만들어야 한다. 벽이 얕은 담장이 되고 그 담장 너머로 서로 통할 수 있도록 벽에 길을 열어야 한다. 그 길은 시골 담장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 줄곧 보며 생활하던 시골 담장엔 따듯함이 담겨 있다. 그래서 그립다.
내 고향은 남해를 대표하는 섬 거제도다. 거제도에서도 외지에 위치한 작은 농어촌 마을로 앞은 바다이고 뒤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을 골목골목에는 아담한 담장이 벽을 이룬다. 시골 담장엔 온기가 살아있다. 차가운 돌 덩어리에 지나지 않지만 뚫린 구멍 사이사이로 시골의 정이 녹아있다. 담장의 높이는 머리 아래에 위치해 집집마다 무엇을 심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공개된 공간이다. 서로 공간을 공유하니 숨길 것도 감출 것도 없다. 그런데 시골 담장에도 변화가 생겼다. 흙 벽으로 숨이 통하고, 돌 벽으로 공간이 통하던 곳이 시멘트로 답답해지다 벽돌로 단단히 막혔다. 머리 아래로 보이던 시골의 정은 높은 담장의 벽 앞에 멈췄다. 시골인심도 벽돌로 세워진 높은 벽을 넘지 못한다. 그 벽돌 하나의 무게만큼 마음의 벽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양반집으로 불리던 정겨운 집은 허물어졌고 단단히 세워진 3층짜리 벽돌집으로 변했다. 마을 어귀의 돌집은 시멘트로 둘러싸이고, 길과 벽에는 살가운 정이 사라졌다. 이제는 벽과 벽 사이의 길이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벽돌 한 장의 무게만큼 벽은 더 단단해졌다. 벽이 벽을 부른다. 더 쌓고 더 단단해지고 더 높아지는 개인주의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 국가 간에도 교류를 막는 긴 장벽을 설치하려고도 한다. 이는 개인주의를 넘어 국가 주의화되어가는 것이다. 만리장성을 만든 시대로 회귀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벽을 허물어야 할 시대에 긴 장벽을 세운다니 인류애는 사라지고 이익집단의 공룡만 살아남는 것 같아 슬프다.
개인주의는 거를 수 없는 대세지만, 이를 넘어서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다. 마을공동체를 표방하며 막힌 사람 간의 벽을 열어 마음의 길을 열게 하려는 모습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벽돌로 쌓인 콘크리트 장벽의 답답함을 느낀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아파트에서 전원주택, 마을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넘어 직접 마을을 만들어 보겠다는 활동들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개인주의가 아닌 공동체로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려는 모습들이다. 대동사회는 되지 못하더라도 소강사회의 꿈은 간직해야 하지 않을까? 개인주의를 넘어서는 길은 공동체적 삶을 사는 길이다. 삶의 중심은 나와 우리다. 나 혼자의 삶이 아니라 우리라는 개념이 함께 포함되어야 한다.
플라톤은 만물에는 그 고유의 목적(telos)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텔로스는 뭘까? 길고 높은 장벽을 세워 단절을 추구하는 것일까? 벽을 허물고 길을 만들어 함께 어울리는 것일까? 인류의 역사는 산에 막히면 뚫었고 제도에 막히면 개혁을 했고 사람에 막히면 소통을 했다. 때로는 강력한 힘의 수단을 동원했지만 막히면 뚫고 나갔다. 실크로드가 막혀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탐험이 시작되었고, 신분제도에 막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시민혁명으로 뚫었고, 사람 간의 장벽은 공동체 사회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빅토르 위고는 가장 힘든 싸움이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했지만, 사람과 사람의 장벽을 허무는 싸움 또한 만만치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텔로스는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담장을 세우고 막힌 벽은 허물어야 한다. 아무것도 없으면 방향을 잃게 된다. 넓은 광야에 길을 인도해 줄 얕은 담장은 필요하다. 그 방향을 이끌 길이 시골 담장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과거 동양적 아름다움을 여백의 미로 표현했다면 지금은 공간의 미가 강조된다. 공간이 막힌 벽을 허무는 틈새의 역할을 한다. 틈은 생명을 유지하는 숨구멍과 같다. 사람이 숨을 쉬듯 벽도 숨을 쉬어야 한다. 그 숨 쉬는 공간, 틈이 필요하다. 아들이 쌓고 있는 벽도 그 사이사이가 탄탄하지 않다. 체계적으로 쌓아 올린 벽이 아니기에 틈새가 있고, 공간이 있다. 그 공간으로 숨구멍이 아직 열려 있다. 그러기에 그 벽이 길이 될 여지가 남아 있다. “벽을 허물면 길이 된다.”는 역전의 묘미를 느끼게 하는 말이다. 비슷한 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의미를 좋아한다. 도저히 안될 것 같은데 뒤집기 한 판으로 반전시키는 마력이 이 단어에 녹아 있다. 꽉 막힌 세상의 벽이 아무리 우리를 가둘지라도 그 벽은 언젠가는 허물게 되어 있다. 무너지지 않는 벽은 없다. 무너지면 흩어지게 되고 흩어지면 언젠가는 다시 모이게 된다. 어떤 형태로 산화되고 변화될지는 몰라도 다시 생명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 벽을 허물면 길이 된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니?”
“뭔 소린지 모르겠어요”
“......”
그래 아직 뭔 소린지 모르는 게 당연하다. 벽이란 존재가 뭔지를 모르고 있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밀어도 밀어도 밀리지 않고 넘어서려 해도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환경을 만났을 때 파놉티콘의 감옥이 연상이 된다. 원형 공간 한가운데 탑을 두고 각각의 공간을 한눈에 쉽게 보기를 원한다. 눈 앞에 없으면 불안하고 보고 있으면 답답한 마음이 부모의 마음이다. 그만큼 사랑한다는 의미이지만 구속하고 싶은 욕구도 어쩔 수 없다. 그 구속이 벽이 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허물지 못한다. 벽은 벽일 뿐이다. 이 말을 기억하자.
“벽을 허물면 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