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끼의 눈>
"세상의 모든 진보는 비이성적인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 이성적인 사람은 세상에 자신을 맞추지만 비이성적인 사람은 자기에게 세상을 맞춘다." -버나드 쇼-
또라이와 천재는 같은 부류에 속한다고 합니다. 범인(凡人)이 보지 못하는 먼 곳까지 그들은 봅니다. 또한 그들은 그곳까지 달려갑니다. 다만 차이점은 천재는 다시 돌아오는데, 또라이는 계속 달린다는 것일 뿐. 그들은 돌아오기를 거부합니다. 촘촘한 삶의 그물망에 갇혀 사는 우리들보다 이들의 삶이 더 자유롭습니다. 매이면 끊어야 하는데 더 깊은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게 지금 삶의 모습입니다.
이성(理性)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받는 교육도 사회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한 이성적 인간으로 훈련시키는 과정입니다. 특별할 것도, 색다른 것도 없이 가두고 키우며 모나면 보듬고 다듬기보다는 울타리 밖으로 내보내 버립니다. 보호받을 울타리를 잃은 청소년이 갈 수 있는 곳은 밝은 곳보다 어두운 곳입니다. 이성적인 사람만이 최적화된 사회 시스템에 적응하도록 만들고 비이성적인 사람들은 낙오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대부분 그렇다는 말입니다.
최근에는 비이성적인 인물들이 각광받기도 합니다. 이들에게는 우리가 갖지 못한 '똘끼'라는 것이 있습니다. '똘끼'는 상식에서 벗어나는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가지고 자기 멋대로 하는 경향이나 태도를 속되게 이르는 말입니다. 이성적 인간은 상식의 범주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교육받고 훈련받아 왔기 때문에 사고의 범주가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비이성적인 사고를 갖춘 똘끼가 있는 이들은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분히 폭력적인 면을 갖춘 또라이도 있지만 일반인이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아이디어를 통해 저돌적으로 추진하는 능력도 있습니다. 세상을 조금 비껴보면 똑같은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항상 걷던 그 길에서 다른 무엇인가를 만났을 때의 기쁨은 이 세상에 없던 것을 발견한 기쁨이라고 해야 할까?
고은 시인의 "그 꽃"이라는 시가 여기에 딱 어울립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저는 이성적인 인간이라 자부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이성이라는 탈을 벗고 비이성적인 인간이 되어보려 합니다. 그렇다고 없던 똘끼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지금과는 다른 시각을 통해 다른 시선을 갖기를 원합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은 지겹습니다. 매일 똑같은 만남에는 어떤 특별한 자극이 없습니다. 진보하려면 더 나아가려면, 나에게 세상을 맞추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 변화의 시발점은 좋은 눈을 갖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작가인 마르셀 프루스트는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존의 관습에 얽매인 눈이 아니라 그 틀을 깨고 부수는 도끼의 눈이 필요합니다.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깰 수 있는 도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