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남주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 p.38 ~ 79

by 글 쓰는 나그네
Non scholae, sed vitae discimus.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공부한다.


'배남주' 대구에서 처형이 운영하는 공부방 이름이다. 의미를 풀면 '배워서 남주자!' 내가 알고 있는 공부방 이름 중에서는 최고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뭘 주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가지기 위해서 배운다.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지기 위해서 배우다 보니 철학이 빈곤해진다고 한다. 가르치면서 배우게 되는데 배우기만 하니 가르침에서 얻는 철학이 빈곤해지는 것이다. 공부하는 머리는 있고 따듯한 가슴은 없다. 나만 알고 타인에 대한 온유한 감정이 없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공부는 앎을 추구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앎은 머리에만 머물지 가슴으로 가는 힘은 부족하다. 그 길에 문을 열어주는 것이 행함이다. 나에게서 너로, 너에게서 우리로 향하는 문이 열릴 때 빈곤한 삶에 고상한 철학이 입히게 된다. 철학에는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왜 사는가? 왜 공부하는가? 누구를 위한 삶인가? 에 대한 근원적 접근을 통해 학교라는 범주에서 벗어나 세상과 인생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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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사유는 끊임없는 질문에서 비롯된다.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의 질문은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였다. 그의 답은 '물'이라고 했고, 1세기가 지난 후 아나시만드로스는 '무한'이라 정의했고, 아낙시메레스는 '공기' 그리고 엠페도클레스는 '물, 불, 흙, 공기'라고 말했다. -김승섭의 <우리 몸이 세계라면> 부분 인용-

같은 질문에 답하는 여러 가설이 경쟁하면서 더 나은 지식이 살아남는다. 우리가 학교라는 범주에 머무른다면 가설을 세우기보다 누군가 주입하는 정의 속에서만 헤매게 될 것이다. 그게 정답이든 오답이든 상관없이 외우려만 든다. 이전까지 받아왔던 교육과정은 이랬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변해가고 있으리라 믿고 싶다. <세인트존스의 고전 100권 공부법>처럼 인문학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배우는 과정, 하나의 키가 아니라 마스터 키를 통해 다양한 문을 열 수 있는 과정을 점점 요구하고 있다. 그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고 학교를 뛰어넘어 인생의 세계로 걸어가는 길이다.

공부는 왜 하는가? 에 대한 나의 단순한 대답은, '배남주'로 정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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