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부하는 노동자입니다.
(Ego sum operarius studens)
무엇이 그리 아쉬운지 그냥 있지 못한다. 가만히 있으면 뒤처지는 것만 같아 두렵다. 그래서 일하면서 배우기에 점점 힘쓰고 있다. 지식을 갈구하는 욕망과 나를 찾아 떠나는 물음에 답하는 과정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 같다. 주경야독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가 되어간다. 하나만 똑 부러지게 잘하면 된다고 듣고 자랐는데, 그 하나를 똑 부러지게 못해서 이렇게 일하면서 배우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되어서 다양한 이야기를 접목해야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되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욕심이 가득 차서일까?
노동과 공부가 결합되는 과정에 매력을 느낀다. 무엇이든 몸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노동이다. 내가 보고 느끼고 몸으로 체험한 것을 글로 매듭짓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최재천 교수의 <통찰>에서 나무가 겨울을 나기 위해서 가지 끝단에 '떨켜'를 만들어 물과 양분의 이동을 막고 잎이 떨어지게 만든다고 한다. 그래야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혹독한 겨울을 견뎌낼 수 있다. 책을 읽고 공부하고 글을 쓰는 이유도 무덤덤하게 스쳐 보내는 자연현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일 게다. 그들의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을 함께 이해하고 싶은 과정이기도 하다. 뭘 알아야 대화를 하든, 질문을 하든 손 내밀어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그 앎의 과정이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승화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나는 노동자일까?
20년을 넘게 관리직으로 근무하면서 노동자라는 생각을 갖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매체에서 서구에서는 선생님도 판사도 모두 노동자로 인정한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노와 사가 확연히 구분되어 있다. 노동조합의 가입 여부에 따라 자연스럽게 분리된다. 과장 이상은 노동조합에서 자동 탈퇴하고 회사의 관리직이라는 신분만 남겨진다. 사무관리 노동조합은 없다. 임금협상과 단체협약을 하며 집회도 하고 노동가를 부르며 권리를 찾기 위해 맞서는데 항상 사측의 편에서 사용자의 입장만 앵무새처럼 읊어된다. 그래서 투쟁이라는 단어도 낯설고 노동가도 낯설다. 몸으로 막고 설득해야 하는 역할에 충실했다. 이제는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왜 내 주장을 못하고 정해준 답에 순응하며 살아야 할까? 당신은 사용자인가? 노동자인가? 묻는다면 답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생산수단을 갖지 못하고 사용자에게 고용되어 노동력(정신)을 제공하고 있기에 엄연히 노동자이다. 뒤늦게 공부까지 하고 있으니 공부하는 노동자라 자부해도 될 것이다. 배움이 그치지 않는 삶, 노동이 멈추지 않는 삶을 통해 땀의 진정한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Ego sum operarius stude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