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태복음 6장 34절>
ㅣ파마를 하다 요즘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러고 보니 복잡하지 않은 날이 없는 것 같다) 복잡한 생각에 사로 잡히면 몸에 변화를 준다. 외부 여건에 따라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서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한다. 눈으로 확인 가능하면 더 좋다. 오늘은 아침에 출근해서 출입문 옆에 붙어 있는 거울을 봤다. 그 거울 속에 비친 헝클어진 머리가 눈에 밟혔다. '그래 파마를 하자'는 결심을 하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파마하겠다고 하니 왜? 그러냐며 지금이 더 좋단다. 내가 전화를 건 이유는 승낙을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통보하는 것이다. 나중에 놀라지 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퇴근 후 주차장에서 차를 타면서까지 고민했다. '머리카락 별로 길지도 않은데 그냥 집에 갈까? 아니야 마음먹었을 때 실행해. 그러지 않으면 미련이 계속 남아. 내가 말했지. 미련을 가질 봐엔 차라리 해 보고 후회를 택하라고. 미련은 접착력 강한 테이프가 붙었다 떨어져 남은 흔적처럼 찝찝함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짧은 순간 별 생각을 다하다, 집을 지나쳐 시내로 접어들었다. 파마를 하면서도 문뜩 20년 전 일이 생각났다. 신입사원이라는 딱지를 떼었지만 여전히 막내였던 내가, 주말에 큰 맘먹고 파마를 했다. 아침에 부끄러운 마음으로 출근하면서 걱정했다. 선배들은 대체로 보수적인 사람들이다. 사무실이 4층인데, 들어서자마자 걱정은 기우가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다. 가장 먼저 만난 선배의 첫마디가 '너 혹시 파마했어? 남자가 무슨 파마냐?' 뒤이어 만난 선배는' 머리가 어째 그 따우냐?'며 한 번씩 흘겨보며 지나갔다. 몇 주간 핀잔만 들었는데 3개월 지나서 다시 파마를 결행했다. 오기가 생기기도 하고 조금 지나니 자연스러워지며 관리하기도 편했다. 모든 게 처음이 힘들지 두 번째 파마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ㅣ어제 오늘 내일 그리고... 걱정은 근심을 불러오고 근심은 오늘을 지운다. 지우개로 빡빡 문지르며 '내일'이라는 단어도 지우고 그곳을 '근심'으로 채운다. 하루의 괴로움이 하루에 그치지 않고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계속 이어진다. 이럴 때면 <길을 묻다>의 이어령 교수님 글이 생각난다. ''어제'는 과거 '오늘'은 현재 그리고 '내일'은 미래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제'도 '오늘'도 순수한 우리 토박이 말인데, 웬일인지 '내일'만은 올래(來)와 날일(日)의 한자에서 온 말입니다. 분명 '내일'을 뜻하는 우리말이 있었을 텐데 언제부터인가 그 말을 잃고 살아온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의 우리말은 지켜왔는데 어째서 내일을 뜻하는 말은 한자말에 먹히고 말았을까요. 우리 민족이 내일을 빼앗기기나 잃어버린 것 같아 한숨이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조금만 더 생각해봐요. 왜냐하면 우리에겐 내일보다 더 먼 '모레'라는 말, '글피'라는 말 그리고 그보다 더 먼 '그글피'라는 말까지 있으니까요."
걱정하지 말자. 우리는 염려하는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다. 적극적으로 문을 두드리면 '내일'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 '글피와 그글피라'는 미래까지 보이게 될 것이다. 앞이 안 보이기에 걱정과 근심이 지워지지 않는다. 걱정을 지우고 근심을 끌어내리는 일을 파마라는 행위를 통해 변화를 기해 봤다.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내 모습에 반격을 한 날이다. 지금의 내 모습은 꼬불꼬불한 어색함이지만 (아내가 핀잔한다. 촌스럽다고, 바보 같다고...) 며칠이 지나고 나면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그다음에는 눈이 익숙해지고 그다음에는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마음이 익숙해질 것이다. 걱정을 지우지 못하고 근심을 끌어내리지 못하는 이유도 생소해서 그러는 것이리라.
ㅣ 그림은 내가 그린다 상황 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그 상황을 만들면 남이 그린 그림이 아니라 내가 그린 그림이 될 수 있다. 남이 그린 그림은 이해 못해도 내가 그린 그림은 이해하지 않나. 이해하면 걱정과 근심도 생소함이 아니라 익숙함이 되어 지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