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모처럼 아들과 함께 거실에서 잤다. TV를 보다 잠들려는 아들 옆으로 베개를 가져다 놓으니 싫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아들 아빠랑 같이 자자" "자리 비좁아요" "뭐가 비좁냐? 그러면 이불 하나 더 깔면 되지" "저는 혼자 잘래요. 불편해요" 그러든 말든, 상관없이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딸과 아들은 함께 자기를 거부한다. 딸이야 스무 살이 넘었으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아들은 중3을 넘어 고1로 접어들었다. 아이들을 보면 내가 살아온 삶의 모습이 투영된다. 거리감 없이 친근한 모습이 아닌 권위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내 아버지와도 어린 시절에나 함께 잤지 중학생이 되면서 일정한 거리를 둔 것 같다. 아버지의 팔 베개를 거부했지만 지금은 아들의 팔에 내 머리를 강제로 맡긴다. 왜 이러냐고 거부하지만 그냥 그러고 싶다. 그가 내게 다가오지 않으니 내가 그에게로 달려가는 이치다. 잠결에 잠시 눈을 떴다. 자기 이불을 걷어차고 내 이불을 돌돌 말아갔다. 추웠다. 다시 뺏고 밀쳤다.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일어나 이불을 덮어줬다. 그리고 잠시 안았다.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사랑이 별건가. 이렇게 따뜻함을 함께 느끼고 전해줄 수 있다면 그게 사랑이지' 잠결에 거부하지 못하고 그대로 안겨있는 아들의 모습에서 안도의 쉼을 쉰다.
몇 년 전 딸에게 물었다. "무인도에 가게 된다면 필요한 것 다섯 개만 적어볼래?" 곰곰이 생각하더니 딸이 적은 다섯 가지는 이렇다.
첫 번째, 친구 두 번째, 핸드폰 세 번째, 휴지 네 번째, 마카롱 다섯 번째, 가족 휴지는 왜 필요하니라고 물으니 무인도에 벌레가 많아서 벌레를 잡아야 한단다. 벌레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황당한 물건이다. 하지만 위안이 된 것은 있다. 다섯 번째인 '가족'이라는 단어다. 딸과 사이가 안 좋을 때였는데 그나마 가족이라는 범주에 아빠라는 존재를 넣어 주어서 섭섭하지 않았다. 엄마라고 했다면 삐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족이라는 범주 내에 있지만 거부당하는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거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소통이 화두가 되는 세상이지만 제일 중요한 소통은 가족 간의 소통이다. 거부당하지 않으려면 끊김 없는 관계의 유지가 필수적이다. 아침 무렵 돌아누운 아들의 등짝을 보며 넓어진 어깨만큼 큰 벽의 장막이 느껴졌다. 신혼 초 돌아누우면 그렇게 싫어하던 아내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등지고 산다는 의미도 살짝 느끼게 된다. 앞으로 아들의 등짝에는 어떤 그림들이 그려지고 어떤 짐들이 얹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