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하는 기쁨의 하나는 새로운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 -p.196- 창조에는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쁨 이면에 아픔이 먼저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고통은 출산의 고통에 견주기도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사용가치나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낸다. 또한 그것에 이름을 짓고 살아 숨 쉬게 만든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없는 것에 가치를 부여해 주는 것이다. 이덕일의 <정도전과 그의 시대>에서 새로운 조선을 세우기 위한 창조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창조의 답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옛것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복고창신에 있다." 즉, 과거를 살려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힘에서 창조의 기운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새로움이라는 덧에 걸려있다. 새롭지 않으면 올더한 것으로 치부한다. 무에서 유는 없다. 다만 모방이 바탕이 된 새로움이 있을 뿐이다.
l 열고 닫는 것
김정운 교수는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에서 천재와 또라이는 같은 부류라고 말한다. 그들은 독특한 시선으로 보고 자신만의 길을 걷는다. 다만, 차이점은 그 길 끝에서 천재는 돌아올 줄 알지만, 또라이는 돌아오기를 거부할 뿐이다. 촘촘한 삶의 그물망에 갇혀 사는 우리들보다 이들의 삶이 더 자유로워 보인다. 이들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두 가지를 한 번에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세상에 열면서 닫는 것이 없는데 창조력은 열고 닫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죠. 이게 바로 창조력입니다." -이어령, 이재철 <지성과 영성의 만남> - 창조가 별건가? 열기만 하던 문을 열면서 닫을 수 있게 하면 된다. 생각해보면 쉽다. 요즘은 자동문까지 설치되어 있어 스스로 열고 스스로 닫힌다. 그런데 왜 열고 닫는 것을 이야기할까? 예전에는 열면 열고 닫으면 닫는 역할에만 충실했다. 열면서 닫는다는 사고의 전환을 하기까지 수많은 시간들이 흘렀다. 그런 생각의 흐름에 변화를 주는 것이 창조력이다. 고정관념에 묶인 사고의 틀을 깨는 것 그게 창조다. 매일 보는 사물에서 새로운 빛깔을 찾아낸다면 그것도 창조고, 매일 만나는 사람에게서 새로운 생각을 읽어낸다면 그것 또한 창조(창의적)이다.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다. 사물을 대하는 시선도 어딘가에 매여 있다면 그 범주 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갇혀 있다면 열어야 하고, 매이면 풀어야 하고, 주저앉아 있다면 일어서야 한다. 그 자리에 머물러서는 생각도 머물고 시선도 머문다. 웅크리고 똬리 틀면 썩기 마련이다. 지키려는 수성(守城)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창조는 지키려는 자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죽음을 불사한 싸움꾼들에게 창조의 여신이 미소 지을 뿐이다.
l 창조는 축적이다.
"큰 나무는 뿌리도 그만큼 크다. 얻는 것이 많아야 줄 것도 많아진다. 내 안에 축적된 것이 있어야 그것을 넘어서는 창조적 모방도 할 수 있다. -김주수의 <글쓰기 스터디 1>- 다양한 시선을 대하는 눈도 내 안에 축적된 자산이 있어야 보인다. 모방을 하려면 모방의 대상에 대한 이해가 선결 조건이다. 향기를 맡고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더 나은 향기를 만들 수 있다.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다르게 만들면 된다. 그래서 기초과학이 중요하고 부수고 다시 짓는 혁신적인 사고가 중요하다. 있는 것을 부수고 그 토대 위에 비슷한 것끼리 융합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엇끼리 통합한다. 이러한 행위 자체가 창조의 행위가 된다. 기존의 시선에서 다른 시선으로 향하는 것, 그것 자체만으로도 창조이다. 즉, 내 모습이 다른 모습이 되고 내 생각이 기존의 틀을 벗어나 다른 사고로 전환하고 있다면 그것 또한 창조의 과정이다. 단순한 과정일지라도, 생활패턴만이라도 바꿔 간다면 창조의 시작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창조라는 단어에 주눅 들지 말자.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는 일도 결국은 내 집 문 앞을 나서는 것부터 시작이다.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듯, 우리들 삶도 작은 한 조각의 방향만 다르게 끼워도 새로워진다. 톱니바퀴도 수직으로 맞물리는 구조가 있지만, 때로는 사선으로 맞물리는 구조도 있다. 늘 똑같지 않다면 그것 또한 창조의 다른 이름이라 정의하고 싶다. 늘 어렵게 생각하면 어려운 길만 찾게 된다. 작은 변화에 큰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에디슨을 넘어 선 발명가이거나 창조적 인간이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창조의 행위는 천재들에게만 국한된 기술이 아니라, 나 같은 둔재에게도 부여된 OOO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