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번호 20150611

(질문) 주는 것이 먼저일까? 받는 것이 먼저일까?

by 글 쓰는 나그네


유치원에 막 들어간 딸이 묻는다.

“아빠. 기역이 뭐예요?”

“아. 기억! 유치원에서 배웠니?”

“네”

“추석 때 할머니 집에서 배 타고 고기 잡았지. 생각나?”

“네. 고기 두 마리 잡았어요”

“그래. 두 마리 잡았지. 그걸 우리 딸이 알고 있는 게 기억이야.”

“아. 알겠어요.”

“그래^^”

“아빠! 그러면 니은은 뭐예요”

“니은……?”



눈높이가 틀리다


단순한 웃음을 전하는 유머지만, 아빠와 딸은 다른 상상 속에 살고 있다. 점점 더 같은 공간에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딸이 전하고자 하는 말과 내가 듣고 싶은 말이 달라지면서 대화의 문이 닫히게 되었다. 어린 시절 서로 해맑게 놀던 모습은 사라지고 필요에 의한 훈육과 요구의 과정만 남겨졌다.


중2 딸과 지속적인 감정싸움을 하고 있다. 항상 희극으로 시작해서 비극으로 결말지어진다. 대화의 본질은 비껴가고 감정의 응어리만 남는다. 그래서 관계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막힌 감정을 풀 방법을 고민하다 용돈을 주며 스킨십을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서로 감사의 표현을 하면 좋을 듯했다. 생각은 바로 실천해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불러 말했다.


“아들, 딸! 아빠에게 뽀뽀하면 용돈 줄 게!”


뽀뽀와 용돈, 절묘한 아이디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이 한마디가 큰 파장을 몰고 오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용돈과 뽀뽀가 얽힌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나는 ‘딸과의 스킨십 사건’이라 정의했다. 아들은 둘째라 그런지 눈치가 빠르다. 아빠의 한 마디에 “네”라는 짧은 대답과 함께 볼에 뽀뽀하고 용돈을 바로 받아갔다. 그런데 딸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당연히 주어야 할 용돈에 조건을 다는 것 자체를 수긍하지 못했다. 딸은 강하게 따졌다. ‘왜? 뽀뽀해야 하냐고.’ 용돈을 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며 그냥 줘야 한다는 것이다. 뽀뽀하면서 용돈 받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며 반발했다. 나 또한 딸에게 뽀뽀 받는 게 뭐가 잘못되었느냐며 그러면 안 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며칠간 당연한 권리라며 부가적인 조건 없이 용돈을 달라는 딸의 요구와 뽀뽀를 먼저 하면 주겠다는 나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딸은 정해진 날짜에 맞춰 줘야 하는 용돈 가지고 장난친다며 불쾌하다 반박했고, 나는 용돈을 부모가 무조건 줘야 하는 의무는 아니라고 맞섰다. 주고 안 주고는 내 마음이라며 거부했다. 딸이 주장하는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라는 말에 더 불쾌했다. 내가 직장에서 힘들게 일하며 얻은 급여로 이 정도 요구도 못 하나라는 씁쓸함이 섭섭한 마음으로 다가왔다. 보다 못한 아내가 중재를 시도했다. 둘 다 마음의 상처를 받았고 절대 자신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상대방이 손들기 전에는 수긍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결국, 딸과 아빠의 감정에 더 큰 상처만 남기게 되었다.


일련의 과정을 정리해보면, 나는 사랑의 표현을 받고 싶어 용돈과 뽀뽀를 접목한 것이고 딸은 당연히 줘야 할 용돈을 가지고 조건을 다는 것에 대해 불쾌한 마음을 가진 사건으로 정리된다. 나는 사랑의 표현이라 했지만, 아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 점도 있었다. 이것 또한 서로에 대한 불신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뽀뽀라고 했지만, 평소 딸과의 관계 개선 없이 일방적인 내 주장만을 강조하였기에 딸로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빠이지 않나?’ 그 정도는 이해하고 애교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 근거 없는 믿음의 결과가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다.


이번 사건으로 딸과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눈높이가 많이 다름을 알게 되었다. 내 눈높이에 맞춰 생각하다 보니 딸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또한, 단순한 용돈에서도 바라보는 지향점이 틀렸다. 아들의 심리는 그나마 이해가 가는데 도통 딸의 심리를 헤아리기는 어렵다. 내 안 고집불통이 딸의 복잡한 내면과 충돌해서, 대화와 타협은 사라지고 감정의 찌꺼기만 생겼다. 아빠가 참 유치하다는 아내의 충고도 들었지만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자존심을 놓지 못했다.



주는 것이 먼저일까? 받는 것이 먼저일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주는 것이 먼저일까? 받는 것이 먼저일까? 라는 케케묵은 숙제가 연상됐다.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철학적 관점으로 접근할 사항은 아니지만 그래도 주고받는 과정의 중요함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선물도 주는 사람의 상황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줘야 한다. 매번 똑같은 선물을 때에 맞춰 준다고 다 같은 선물이 아니다. 매번 주면 받는 사람은 당연한 권리로 인식하게 된다. 선물은 철저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상대가 생각하는 것에서 ‘+1’이 될 때 받는 사람이 즐거워진다. 그게 선물이다. 그래서 주는 사람은 항상 고민하고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줄 것인가? 무엇을 줄 것인가? 어떤 마음으로 줄 것인가? 형식적인 관계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면 마음을 담아 전해야 하는 것이 선물이다.


매월 주는 용돈도 마찬가지다. 때가 되어서, 자녀가 요구해서 수동적으로 주는 행위로 그쳐서는 안 된다. 부모의 마음이 그 안에 담겨야 한다. 아이들도 소비를 통해 배운다. 쓰면서 돈의 가치를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용돈이 자녀를 묶어두는 수단이 아니라 부모와 자녀를 연결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잘 줘야 한다. 애정이 깃든 표현과 함께 전해야 한다. “딸! 필요한 것 많지. 부족하지만 아빠의 마음을 담았다. 필요하면 더 얘기하렴. 사랑한다. 아빠 딸!” 많이 오글거리는 멘트이다. 하지만 딸과의 스킨십 사건으로 배웠다. 부모의 권위를 앞세워 일방적으로 주는 행위가 아니라 ‘어떻게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대가 바뀌었다. 상·하의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평등을 추구하는 시대이다. 평등이란 화두는 사회가 더 빠르게 요구하고 변해가고 있지만,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수직이 아니라 수평의 관계가 더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다. ‘줄 테니 받아라.’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역할의 개념으로 변할 필요가 있다. 직장에서도 열심히 일한 대가로 소중한 급여를 받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가정의 행복을 위한 자기만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역할에 대한 대가라는 개념도 필요하다. 단순히 의미 없이 주는 것보다 용돈에도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 어떨까?

요즘은 직접 돈으로 주기보다 통장으로 송금한다. 금융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통장과 카드를 만들어 줬다. 그래서 예전보다 손으로 전해지는 따듯함은 덜하다. 그래도 말로 전하기 힘든 내용은 카톡으로 보낸다. 가끔은 말보다 SNS를 통한 전달이 훨씬 유용할 때가 많다. 머릿속 생각이 정리되고, 말은 잘 못 해도 사랑한다는 ‘하트♡’ 이모티콘도 보낼 수 있으니, 의미 전달이 훨씬 쉽다. 뽕뽕 사랑의 하트를 주고받는 사이가 백 마디 말보다 더 좋을 때가 있다.


수년이 지간 지금, 인제 와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유치했다. 그게 뭐라고. 조건을 내밀고 그 조건을 쟁취하기 위해 딸과 벌이는 닭싸움 수준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닭싸움이 있었기에 용돈에 대한 생각, 주고받기의 중요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부딪히고, 아프고, 힘겨움은 인생에서 작은 파이 한 조각일 뿐이다. 그 작은 파이들이 모여 피자가 되고 삶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풀지 못한 의문은 남아 있다. 만약, 순서를 바꿔 `먼저 용돈을 주고 뽀뽀를 요청했다면 딸이 어떻게 반응했을까?`라는 의문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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