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회사에서 실장님이 내부 테스트를 위해 자녀들을 데려온 날이 있었다.
작은 회의실 한쪽에는 태블릿이 몇 대 놓여 있었고,
우리는 그 안에 담긴 프로토타입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테스트를 진행했다.
디자이너였던 나는 화면의 흐름과 설정을 설명했고,
아이들은 태블릿을 손에 꼭 쥐고 신기한 듯 여기저기 눌러보며
자신만의 시선을 솔직하게 내놓았다.
버튼 하나를 누르고도 표정이 환하게 바뀌거나
뜻밖의 지점을 지적해 주기도 했다.
그 솔직함에서 우리는 늘 새로운 통찰을 얻었다.
무엇보다 지금도 선명한 장면은
테스트가 끝난 뒤, 우리 디자인팀이 아이들과 섞여
그 자리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며 놀던 시간이다.
색연필이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고,
아이들은 우리가 만든 캐릭터를 따라 그리거나
자기 마음속 세계를 자유롭게 펼쳐 보였다.
디자이너들도 어느새 그 옆에 앉아
한 선, 한 색을 나누며 부드럽게 웃었다.
일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따뜻했고,
놀이라고 하기엔 우리가 얻는 것이 너무 많았던 순간이었다.
몇 년이 지나 회사를 옮긴 뒤, 실장님과 저녁 식사를 하게 됐다.
그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마음을 건드렸다.
그날 테스트에 참여했던 자녀들 중 한 친구가
지금은 그림을 전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유 중 하나가,
그날 디자인팀이 자신과 함께 그림을 그려주며
놀아줬던 시간이
정말 인상 깊었다는 것이라고 했다.
스쳐 지나간 줄 알았던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오래 남아 방향을 바꾸는 기억이 되었다니,
말없이 마음이 뜨거워졌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이런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가 건넨 말이 누군가에게는 별이 되고,
누군가의 말이 내 안에 오래 머물기도 하고.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 아주 작은 각도로 스며들며
서서히 방향을 바꾸게 만든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변화는
이렇게 생긴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변화.
그리고 그 변화가 누군가의 삶을 조금 더 단단하고 밝은 곳으로
이끌어 주기도 한다.
그 아이가 전공을 결정하는 데
우리의 작은 순간이 스며 있었다는 사실은
내게도 오래 남는 빛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