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자기 계발 강사이자 작가 크리스텔 프티콜렝의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라는 책이 우리나라 출판계를 강타한 후 "예민함"은 자기 계발의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신경증의 영역에서 조금 벗어난 생각을 말하고 싶다.
" 삶이란 그저 상처 받지 않으려고 살아가는 생존본능" , " 나는 평범한 인생을 둔감하게 살아왔다"
줄리안 반스의"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 등장하는 생각들이다. 사실 "삶의 둔감함"은 오랫동안 내 마음에 머물던 화두였다. 둔감함을 "성격" 측면에서 보면 "둔하고 느린 것" 정도로 생각 들지만 "삶"으로 영역을 확장해보면 우리가 생각할 것들은 참 많다.
삶에 둔감하다는 것은 우리가 직업= 일에 몰두하다 정작 "살아가는 이유의 무관심"을 의미한다.
내가 살던 미국 동네에 작은 호수가 있었다. 그곳은 식수 공급을 위해 만든 인공 호수다.
작은 도시의 이 공간은 비단 식수공급뿐 아니라 마음 재생을 공급하는 매우 유용한 공간이었다.
그 댐을 지날 때나 시간이 있어서 그곳에 머물 때, 타향의 외로움은 많이 해소되었다. 호수 한가운데 공원은 넓은 잔디, 작은 캐빈, 바비큐 그릴, 작은 전망대 등과 작은 짐승들의 조화를 이룬다. 다람쥐와 뛰노는 강아지, 잔디에 누워 선글라스 끼고 광합성하는 백인들, 그 사이에 누워 있으면 나도 영화 속 주인공이 된다.
나는 그때 처음 삶의 주인으로 나를 예민하게 바라본 적이 있었다.
웃음소리, 대화, 가벼운 음식, 가족, 새소리, 호수의 보트 이런 것들이 사실 삶의 행복이었다.
잃어버린 소리와 풍경을 만나 제대로 예민해지면 타인도 보이고 자신이 선명히 보인다.
삶이란 순간을 느끼며 사는 생명의 여정이다.
윤회를 통해 순환하는 생명의 고리를 믿고 살거나 천국에서 영원토록 사는 것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2020년을 사는 우리는 과거 지성들이 고민하던 삶의 저편에 대해 더 많은 지식과 이해를 가지고 있다. 적어도 번개가 신의 분노라는 무지에서 벗어나 있고 종교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것도 현대인들은 안다. 그렇지만 둔감한 지금은 금방 지나며 무한한 어둠 앞에 홀로 서야 하는 예민한 순간도 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22년 전 개봉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톰 행크스 주연의 전쟁 명작이다.
영화의 초반 오마하 해변 상륙작전은 인간, 전쟁, 죽음은 무엇인가? 강렬한 질문을 던지며 잔인하게 다큐처럼 죽음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개발한 폭탄에 갈기갈기 몸이 찢겨 나간다. 실제 상륙전을 체험한 참전용사들은 그 영화를 보고 냄새만 다르지 모든 것이 똑같다고 한다. 그들은 달려가는 죽음을 경험한다. 전장으로 달려가고 상륙하러 달린다. 죽음을 기다리지 않고 그 안으로 달려 들어간다. 자연스럽게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시대를 만나는 인류는 그리 흔치 않다. 그래서 삶이 의욕을 잃을 때 지쳐서 용기가 필요할 때 난 어김없이 죽음에 달려가는 비릿한 이 영화를 본다.
삶의 둔감함 에 이런 측면도 존재한다. 죽어가는 동료를 보고 둔하지 않으면 더 살아남기 힘든 외면이다.
모르는 척 보기 싫은 것은 외면하고 달콤한 것만 주목하는 우리의 편협한 욕구다.
자기 이익 말고 세상에 중요한 것이 한 개도 없는 감정은 삶이 둔감한 거다.
아내는 밥해주고 아이 보고 밤에는 요녀. 남편은 돈 잘 벌고 가사 돕고 밤에는 돌쇠. 여기서 만족하고 생각이 멈춰 더 이상 함께 고민할 것이 없다면 삶에 둔감한 거다.
줄리안 반스는 <예감~>에서 기억에 대해 힘 빼고 연마된 철학적 사유를 툭툭 던진다. 그의 글투는 하루키를 닮았고 스티븐 킹을 연상시킨다. 조금 다른 점은 깊은 철학의 기본기가 그에게 느껴지는 것. 아마 그가 철학을 공부해서 그런지 모르고 간접 죽음 경험에서 나온 것 일수도 있다. 12년 전 줄리안 반스는 문학적 동지이며 에이젼트였던 아내 팻 캐바나를 뇌종양으로 잃었다. 올해 그가 74세니까 62세에 아내와 사별하고 사랑하던 존재의 궤도이탈에 따른 정신적 고뇌와 기억의 소산에 대해 정리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주 신과 종교에게 냉소적이고 죽음에 대해 진지하다. 기억은 자기 멋대로 조작한 자기만의 편린이라는 그의 생각 덕분에 나는 오늘 삶의 둔감에 대해 나 스스로 정리하였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사유가 깊어짐과 동시에 몸의 느려짐에서 오는 좌절이다. 그간 살아온 삶에서 얻은 쓴 나물 같은 슬픔, 상실, 실패, 무능, 외면, 고독 등이 버무려져 적어도 40대 후반~50대, 60대 초반에는 최소한 자기 정체 Identity의 확고한 정의 definition나 자기 맛이 나야 한다.
이 작업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본다.
나는 삶에는 계속 예민하고 싶다.
오늘 잠시 멈추어 서서,
내 삶의 둔감함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