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그것은 완벽주의자 당신과 즉흥적인 내 성격 탓도 아니다. 우리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해력 차이다. 완벽한 사람은 보이는 것에만 치중한다.
보이는 것 말고도 세상에는 진실을 증명할 여러 가지가 있다. 믿음은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데이터를 보고 믿음이 증명된 것인 양 투자도 하고 예측도 하지만 사실 그것은 종이 한 장, 사람의 기대에 불과하다. 내가 회사를 다녀 알지만 과거의 데이터를 이용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백두산 폭발 날짜나 전염병 마감 시간을 모르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사람은 그저 믿음을 보이는 수치로 만들어 사고 판다.
남편, 너는 지금 이혼을 앞둔 시국에 너와 나 사이 차이만 주목하는데 부부가 함께 산다는 게 겨우 경제력이나 성격 차이 만으로 평가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건지 되묻고 싶다. 사람이 80년쯤 안전하게 아무 일 없이 사는 것도 기적인데 부부가 사오십 년 별일 없이 버티는 것도 기적이다. 삶이 언제나 진심으로 만족스러운가 물으면 나는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죽으면서 왜 후회할까? 그건 자신의 시간을 통과하며 보지 못한 것을 뒤늦게 발견해서 그런 거다.
내가 이혼하려는 진짜 이유를 완벽한 네가 한번 찾아봐라. 그거 찾으면 내가 오빠라고 부르마.
아니 그것을 찾더라도 순진하고 단순한 네가 펄쩍 뛰며 이혼은 극구 반대하겠지만. 솔직히 네가 집에서 대화 좀 하자고 네 주량 소주 반 병 넘겨서 겨우 한 병 마시고 내 앞에 용기 내어 대면했을 때 난 네가 떨고 있는 것도 알았다. 문제 투성이 성질머리 더러운 네 마누라가 없으면 안 되겠지, 앞으로 밥도 더 잘하고 청소랑 내 대리운전 뒷바라지도 더 잘해서 나를 잡고 싶겠지. 왜 그럴까? 남들이랑 다르기 싫어서? 내 생각엔 네가 너 자신보다 나를 1만큼 더 사랑해서 그렇다. 사실 나도 너를 나보다 1만큼 더 사랑한다.
하지만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다. 우린 이대로 쭈욱 이길로 가야 한다.
지금도 같이 살며 별거 아닌 별거에 우린 대화를 많이 했다. 대화라기보다 내가 그동안 아내한테 뭘 잘못했냐고 따지고 조목조목 나를 변호하는 자리다. 아내에게 차인 기분이 억울해서 그때마다 술 마시고 말했다. 제정신으로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내는 이번에 별로 내 주장에 토 달지 않았다. 나를 설득해서 이혼에 성공하려고 그런지 모른다. 난 마지막 대화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누나가 이혼해서 행복하다면 내가 해줄게 "
아내의 요구조건은 의아했다. 딸의 친권자와 양육자로 자기말고 나로 지정 할 것, 언제든지 보고 싶으면 만나게 해줄 것 , 추억이 깃든 집은 팔지 말고 딸과 그곳에서 지낼 것, 매월 수입 일부를 자신에게 송금할 것.
이것이 그녀가 제시한 조건이었다. 재산분할을 예상했지만 그건 필요 없다고 했다.
아내와 함께 법원에 이혼 수속을 진행했다.
숙려기간에 아내는 친정에 가 있겠다고 했다. 혼자 아이를 케어하는 연습이라고 말했다.
나를 키워준 새어머니는 달려와 울었다. 그리고 자기가 도와준다고 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다.
그러다 다음에 집에 와서 술 한잔 하며 얘기 좀 하자고 짤막하게 말했다.
솔직히 나는 이 길을 가면서 왜 지금 이렇게 되어가는지 이유를 정확히 모른다. 내가 끝까지 반대하고 거부해야 했는지 아니면 아내가 남자가 생긴 건지 알아봐야 할지 모른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인지, 이게 틀린 거라면 이혼을 되돌릴 방법과 시간은 아직 남아있다.
내가 완벽주의를 포기하고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빌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자존심 상한다.
이 감정은 무엇일까? 화도 나고 슬프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다. 우리 딸 눈물 나게 하는 아빠가 안되고 싶었는데 아이는 지금 다 아는 것 같다. 아내가 말했겠지.
엄마 없는 숙려기간 동안 아이랑 대화 좀 많이 해봐야겠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나를 끔찍이 사랑하시던 장모님이 아무 말씀 없다는 것이다. 이건 필시 당연히 아내 편이실 장모님이 나와 정 끊기를 시도하는 것인지 모른다. 굳이 찾아가서 뭐라 하기 곤란한데 만나서 대화 좀 하자 할까? 나도 어른인데 판단이 서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