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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Apr 11. 2020

우리 재혼할까요? V

오늘은 엄마와 내가 아저씨를 같이 보기로 한 날이다.


엄마는 얼마 전부터 소개할 사람이 있다 했고 그날 우리 모녀는 아침부터 분주하게 그 만남을 준비했다.

뭐가 좋은 건지 우리 둘이는 시종일관 까르르 거리고 코카 깐돌이도 우리 모녀의 들뜬행동에 평소보다 점프를 더 많이 했다. 원래 내가 남자 친구 소개하는 상황이 돼야 하는데 이건 뭐 딸이 엄마 남자 친구를 소개받아 이상하고 낯설다. 결혼 상견례도 아닌데 엄마는 좀 들떠 보였다. 평소에 안 입던 드레스를 침대 위에 종류별로 늘어놓고 이건 어때, 저건 어때 할 때 사실 알아봤다. 나도 잘 보이고 싶은지 덩달아 엄마옷 위에 드레스를 포개 놓고 이것저것 몸에 맞춰 보고 있었다. 


여의도 콘래드 호텔  제스트 뷔페에서 만나기로 해 더욱 선보는 느낌이 들었다.

제스트는 아빠랑 한번 가봐서 연어 색이 싱싱했던 기억이 있다. 고급스럽고 넓은 실내가 가족들 오붓하게 식사하기 좋았고 그때 내가 좋아하던 기억이 나서 아마 엄마가 일부러 그곳을 고른 것 같았다.


조금 이른 점심에 도착했다. 나야 뭐 발레파킹부터 대접받는 식사자리를 즐기는 편이라 부담 없이 회나 실컷 먹고 아저씨 얼굴 구경하다 오면 그만이지만 엄마는 약간 긴장도 하고 무지개처럼 보기 힘든 홍조마저 얼굴에 피어 있었다. 들어서자 저쪽에 잘생긴 훈남 아저씨가 손을 흔든다. 엄마가 눈인사를 하며 나를 이끌었다.


" 어서 오세요, 차는 안 막히고 잘 오셨나요?"


한껏 멋을 낸 쥐색 양복에 손본 지 얼마 안돼 보이는 세련된 헤어스타일의 말끔한 아저씨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말씀드린 제 딸이에요, 인사드려라"


아저씨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는 손이 참 곱고 여자 같았다.  고생하며 자란 손이 아니다.


 " 여사님이 여기로 정해서 궁금했는데 예약하고 와보니 참 깨끗하고 조용합니다"


풋 여사님이란다. 내가 엄마 놀릴 때 쓰는 호칭이다.


우리는 식사부터 했다. 조용한 클래식 음악과 가볍게 달그락 거리는 식기 소리, 부지런히 서빙하는 언니들 모습 이 낯익다. 이 자리에 아빠랑 왔었는데 지금 어쩌면 새아빠 될지 모르는 아저씨와 함께 앉아 있다. 두 분 다 어색한지 말이 좀 없다. 이럴 때 내가 분위기 띄워야 하나 망설이다 학교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우리 학교에 목련꽃이 정말 많아요.  그런 제가 어느 대학인지 아실까요? " 요즘 애들처럼 틀린 어법으로 물었다. 아저씨가 갑자기 내가 낸 돌발 퀴즈에 당황하더니


"남녀공학인가요?" 하고 되물었다. "아이 참, 우선 말씀 놓으시고요" 


"아, 그럴까요?...... 그럴까?" 


퀴즈가 이어졌다. 무슨 스무고개처럼 한 고개씩 "흠, 좋아요" 잘 따라오던 아저씨가 "엄정행" 하자,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가곡 부른 옛날 성악가!   "오, 좋아요" 그럼 "회기역?"하고 내가 말했다.


"아, K대학이구나"  아저씨가 바로 맞혔다. 


"어머 금방 맞히시네요,  와보신 적 있어요?"


아저씨 절친이 그 학교 출신에  K 의료원 치대 교수란다. 그래서 치료 때문에 갔다가 그 친구와 학교 산책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분위기가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분위기 잡히고 두 번째 접시 돌고 나자 엄마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우리 식사 마치고 너네 학교 가서 산책하자." " 좀 멀지 않아?" "주말인데 차 안 막히면 뭐 금방 가지 어차피 꽃구경도 하는데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 난 거기 가면 좋겠다."  


 아저씨는 여사님이 좋으면 자기는 오케이라고 했다. 나는 엄마 이름에 씨라고 붙여 부르라고 웃으며 훈수했다."원래 그렇게 불러, 그런데 오늘 너 첨 만나서 격식을 갖추고 싶으신가 보다." 엄마가 변호하다 또 둘 다 크게 웃는다. 웃음소리가 묘하다. 아빠는 크게 웃을 때 조커처럼 "히히히" 웃고 아저씨는 "하하하" 웃는다.


나는 아빠 웃음소리에 불만이었다. 교수가 좀 체통 있게 웃으라고, 그러면 아빠는 날 너무 좋아해서 내가 하는 말을 무조건 받아 주기에 그 순간 한 번은 조용히 웃었다. 그런데 묘하다 아빠의 기억이 남아있는 같은 장소에서 오늘은 밝은 소리, 알이 꽉 찬 연어의 점프 소리 같은 웃음이 가득하다. 


아저씨는 우리 애견 깐돌이 이야기가 나오자 어릴 때 키운 진돗개가 세 살 때 개장수에게 잡혀갔다 탈출해 돌아와 마지막에 교통사고로 죽은, 참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지금은 개를 안 키우고 보는 것만 좋아한단다.


나는 일단 남자가 애견인인 것이 좋다. 물론 내 편견일지 모르지만 개를 사랑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심성이 착하다. 뭐랄까? 생명에 대한 존중? 이런 것이 있다. 그래서 혼자 애견 키우는 남자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애견인은 대체적으로 부지런하다. 아저씨랑 애견 대화를 하다 보니 기본적으로 아저씨가 생명에 대한 애정이 속에 듬뿍 담겨 있는 것을 보았다.  


그날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꽃놀이 까지 함께 했다. 마치 어릴 때 가족이 딱 한번 함께 에버랜드에 가서 하루 종일 놀이기구 타고 맛있는 거 먹던 어릴 때 그날처럼 기뻤다. 


아저씨는 아들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큰애는 고등학생이고 둘째는 중학생인데 혹시 자기 아이들 방문 과외할 생각은 없냐고 깜짝 제안을 했다. 좀 당황스러운 말이라 엄마 얼굴을 쳐다보니 엄마는 그냥 웃는다. "집에 가서 엄마랑 의논하고 제 시간도 좀 보고 알려드릴게요" 나는 너무 빨리 가까워지는 것이 좀 두렵다.


집에 가면서 생각했다. 모르는 남자와 처음 만나 이렇게 즐거울 수 있을까? 

솔직히 이 즐거움은 내 즐거움이 아니다. 난 엄마가 기쁘면 따라 기쁘다. 엄마가 많이 웃고 즐거워하니 나에게도 그 즐거움이 쉽게 스며 들어온 것이다.  


저녁은 수제비나 끓여 먹자는 엄마 말에 나 혼자 누리던 생각의 고요가 깨졌다.

하루 종일 머 먹으면 그다음 머 먹을까 걱정하는 함바집 아낙 같은 여자의 일생이  웃프다.

" 아저씨 어때?" 깨진 침묵 틈으로 엄마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 후후, 점수 매겨줘? 합격이야" 엄마는 운전하는 내 어깨를 아프게 탁 치며 부끄러워했다.

" 얘는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긴 뭐가 그게 아니야? 우리 여사님 아저씨 좋아하고 있구먼,  딱 걸렸어"


그날부터 아저씨와 엄마가 정식으로 사귀는 1일이라고 내가 정해 주었다.




아이들 과외를 결심한 것은 내가 혼자 커서 동생이 어떤지 궁금한 것도 영향이 있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그냥 애들과 아저씨가 불쌍했다. 이혼해도 엄마가 좀 키우지 아이를 놓고 나간 여자도 궁금했다. 무슨 사연이 있겠지. 그날 조심스럽게 아파트 벨을 누르자 할머니가 나오셨다. 


" 안녕하세요?" " 아, 얘기 들었어요. 아이들 공부 도와준다고?"


 덩치 큰 녀석들이 아빠에게 사전교육을 받은 건지 방문교사 맞이하는 어린애처럼 두 손에 깍지 끼고 

공손하게 문 앞에 나와 서 있다. 멀끔한 애들이다. 키도 크고 완전 귀공자 얼굴이다. 아이들 방에서 한 시간씩 두 아이를 번갈아 챙겨 주기로 했다. 영어는 잘하고 수학만 집중적으로 도와달라고 했다. 아이들 방은 정갈하고, 세련된 가구 배치하며 아이들 생긴 것과 흡사했다.


 어색한 처음을 이기려면 선생인 내가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았다.


" 아빠가 누나 어떻게 소개하디?" 

  아이들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 아빠 동창 딸인데 짱 공부 잘하는 누나라고 했어요" 


그래 그렇게 시작하면 되겠구나.  아이들 책상에는 사진관에서 찍은듯한 엄마와 아이 둘이 찍은 사진이 있었다. 언뜻 봐도 대단한 미모와 반듯하게 앉은 다리에 하이힐만 봐도 있어 보이는 엄마 같았다.


" 엄마?" "네" "네가 엄마 닮아서 잘생겼구나." 아이가 또 살짝 미소를 보인다. 


그날 이후 난 아저씨보다 아이들과 금방 더 가까워졌다. 동생이 있다는 것, 가족이 있다는 것이 어떤 무게감인지 알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엄마와 아저씨가 재혼하면 좋겠다는 마음도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 마지막 6회 곧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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