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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Apr 13. 2020

우리 재혼할까요? VI

엄마 행복을 위해 뛰어다니던 일이 엊그제 같다.


그 설레고 요란하던 계절을 뒤로하고 나는 지난해 8월 한국을 떠나 미국 일리노이주의 대학으로 유학을 왔다. 물론 내 후견인 역할하는 아빠가 교환교수로 와 있었던 조용하고 환경이 좋은 학교다. 여기는 한국 학생은 별로 없고 주로 백인 미국 학생과 소수 흑인, 동양인 그리고 인도 학생들이 조금 있다.  유학은 아빠의 권유가 제일 크게 작용했지만 다른 세상을 엿보고 싶은 나의 호기심도 보태진 것 같다. 여기 와서 보니 언어가 제일 큰 문제고 문화와 생활스타일 적응이 그다음으로 제일 어렵다. 음식이야 김치 없는 것 말곤 별로.


은행에서 어카운트 account 트는데 한국과 너무 달라서 신기하고 긴장했다.

우리는 은행에 사람도 많고 대기표 받아서 띵동 에 익숙한데  여기는 조용하다. 별로 사람도 없고 손으로 써서 만들어 주는 것이 많았다. 두 나라가 가진 생활 방식이 너무 다르다.


인터넷은 느리고 배달문화도 다르고 하지만 여기는 여기대로 좋다. 뭐랄까 좀 슬로 시티 Slow city 같은 것이 마음에 든다. 지평선이 길어서 아침에 해가 바다에서 떠오를 듯 지평선을 타고 올라온다. 세상에 밤에 별도 보인다. 지구가 둥근 것을 여기 와서 처음 알았다. 건물이 별로 없으니 목가적 분위기가 나를 소설 속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었다. 아빠가 여기를 추천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한국 뉴스도 안 보고 주말에 한번 한국소식을 챙겨보니 지난 소식은 별로 신나지 않다. 축구 녹화 보듯 재미없고 흥미롭지도 않다. 생각해 보니 실시간이 뭐든 가장 재미있다. 종합하면 소음이 사라진 느낌이다. 한국은 참 시끄러웠다. 그중에 제일 시끄러운 게 뉴스였던 것 같다. 이것을 "다이내믹 dynamic 코리아"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다른 입장에서 보면 "노이지 noisy코리아"라 할 수도 있다.  여기 교포들한테 "한국은 재밌는 지옥 미국은 재미없는 천국"이란 옛날 유머 듣고 참 맞다는 생각도 했다. 

뉴스 안 보고 살다 보니 시간이 많아졌다. 하루 길이는 같은데 여기 하루는 더 길다.   


다른 세상은 다른 삶을 선물로 주었다. 이곳에서 얻은 소중한 시간들은 나를 돌아보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했다. 엄마의 재혼도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들었고 인간에게 결혼이란 무엇인가? 하는 고급스러운 질문도 스스로 던져 보았다. 여기서 생활하다 보니 결혼이란 "다른 세상에 와서 사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국 친구들 좀 사귀었는데 미국애들 정말 많이 다르다. 한국에 있는 미국애들이랑 여기 애들이랑 또 다르다. 우리는 처음 마주친 다름을 신선한 경험으로 읽는다. 결혼도 처음엔 그렇게 다름을 신선해하다가 곧 무례해지고 신선한 다름이 썩어가는 것은 아닐까?  다름은 썩다가 갈등으로 변하고 갈등은 이별로, 마지막엔 생각 조차 재가 되겠지.

 

아참, 한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학교에서 40분쯤 차 타고 가면 그곳에 한인교회가 있다. 거기에는 작은 미군부대가 있는데 한국에서 미군을 만나 결혼한 이모들이 제법 모여 산다. 그래서 교회도 생기고 구멍가게 같은 한인마켓도 있어서 유학생들 몇 명이 마켓에 라면 사러가다 교회를 나가기 시작해 다 모이면 오십 명 정도 되는 교회에 나도 다닌다.


나야 뭐 원래 무종교였지만 그렇게 처음 입문한 교회에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목사님이 계셨다.

한국에서는 교회나 목사에 대해 색안경 끼고 바라봤는데 여긴 전혀 아니다. 사람들이 너무 착하고 좋다. 이들은 한 달에 한번 인근 교도소도 방문해 봉사 활동하는데 나도 거기 몇 번 가보았다. 여기 죄수들은 영화에 나오는 갱하고 너무 다르다. 그냥 평범한 동네 미국 아저씨들 같다. 그리고 여기 사람들 키도 그렇게 크지 않다. 그냥 보통 한국 남자 키랑 비슷하다. 미국 사람은 다 키 크고, 코 크고 머리가 노란 줄 알았는데 선입견이었다.


한인교회 다니는 덕분에  국제결혼하신 이모님들 한테 김치 정말 무지하게 얻어먹는다. 김치, 김치찜, 김치찌개, 김치 부침개, 김치라면, 부대찌개, 김칫국, 교회 하면 김치가 생각난다. 그리고 목사님은 교리보다 삶을 강조한다. 그분 모토는 "신앙과 삶이 하나 되어" 다. 난 이게 마음에 들었다. 그분은 한국에서 감리교 신학대학을 마치고 미국에 신학대학원 M.Div 졸업하고 석사과정 Th.m 하나 더 해서 꼭 유학생 같다. 


그의 아내는 혼혈 미국인이다. 백인 아빠와 아프리카계 엄마 사이에 태어나 정말 예쁘다. 흑인 특유의 곱슬머리도 아니고 피부도 검정 아닌 갈색톤이다. 키는 170CM 정도, 처음에는 왜 젊은 모델이 이 작은 교회를 나오나 했다.  그녀는 한국말도 좀 할 줄 안다. 그냥 다 신기하다. 삼촌 같은 목사님에게 그들의 모험적인 연애담을 꼭 들을 예정이다. (우리 아빠한테 혼혈 흑인 사위 후보 내가 데리고 가면 권총 구해서 자기 머리에 댈지 모른다)


 나는 그렇게 이곳에서 감리교 신자가 되었다. 세례도 받았다.  낡은 기독교를 떠나 원래 성서가 말하는 진리에 귀 기울이고 삶에 그것을 녹여 거친 세상 살아가는 용기를 얻으라는 설교에 나는 감명받았다.

여기 유학생 오빠가 군대에서는 빵에 속아 교회 가고 여기서는 김치에 속아 교회 나온다고 해서 빵 터진 적이 있었다. 나는 여기 깨끗한 사람들이 좋아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물론 김치 사랑도 조금은 있다.)  


한국에서 엄마와 아저씨는 아직도 사귀고 있고 아이들의 과외선생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녀석들은 한국의 위대한 인터넷 기술로 미국의 나를 여전히 감시하고 영상 통화한다.

엄마는 나 대신 아저씨 아이들 챙기느라 바쁘다. 과외 공부 대신  요리 과외 아줌마를 얻었다. 요리를 곧잘 따라 한다고 한다. 여전히 그들은 웃으며 살아갈 것이다.


일상은 빠르게 흐르지만 지나고 나서 사진이 되어버린 그때를 다시 보면 그때 일상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정신없는 일상을 내려놓고 외국에 나와보니 높은 데 나는 새처럼 아래를 내려 보게 된다. 여기서 나는 공부에 바쁘지만 삶을 내려 보아서 참 좋다.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도 몸을 떠나 자기 살던 곳과 삶을 내려다보며 한 번쯤 높이 날아보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아참, 아저씨가 몇 달 동안 많이 아펐었다.  미련하게 혈압약 안 먹고 관리 안 하다가 새벽에 하반신이 마비되는 불상사를 당했다. 다행히 119가 빨리 와 골든타임 안 놓치고 십년감수했다. 가벼운 뇌경색 진단받고 약물로 혈관을 뚫어 일주일간 입원하셨다. 엄마는 가게 문 닫고 일주일 동안 꼬박 아저씨 병간호하고 아저씨는 엄마한테 감동받았다.  신기하게 엄마는 위기 앞에 사랑을 느꼈다고 했다.(이것도 나만 아는 비밀이다) 아저씨는 약간의 후유증만 남기고 지금은 정상적으로 혈압약 먹고 운동 병행하며 열심히 살아간다.

 

내가 주말은 한국과 소통하고 한국 책을 읽는 시간으로 즐기기 때문에 주말이 항상 기다려진다. 

그러다 한국 떠나며 아저씨에게 전해 드린 편지를 노트북 내 문서에서 발견했다. 내가 글씨를 잘 못써서 이걸 복사해 마지막에 내 이름 쓰고 편지 봉투에 넣어 공항에서 떠날 때 아저씨에게 드린 것 같다.  


                                                                새아빠 보세요


아저씨, 저 정인이에요. 


우리가 모교 교정 꽃길 걸을 때, 그것이 제 인생 추억 샷이었던 거 혹시 아시나요? 그 순간 참 행복했어요.

한 번도 남자 어른 좋아해 본 적이 없었는데 저는 아저씨 보자마자 제 타입이라 그런지 엄마에게 참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바로 가졌죠. 그날 제가 좀 까불던 것도 기억하시나요? 전 아저씨가 좋았어요.


아저씨 때문에 동생들과 과외공부 추억 만들면서 마치 이전에 언젠가 우리가 가족이었나 할 정도로 친숙하고 행복했어요. 민이와 혁이도 원래 내가 누나였던 것처럼 굴더라고요.


그 뜨거운 몇 달을 뒤로하고 떠나게 되니 마음이 짠 합니다. 방학 때  빨리 와서 엄마 청국장도 먹고 우리 다 같이 놀이공원이랑 강원도 여행도 가면 좋을 것 같아요. 고속도로 휴게소 음식도 먹고. 후후


제가 점점 어른이 되어가니 아저씨가 우리 엄마 책임지시면 참 좋겠다는 생각,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예쁘게 잘 만나시고 결혼식은 강원도 펜션 하나 빌려서 정말 소중한 사람들만 모여  1박 2일 캠핑하듯 하면 어떨까 생각하며 건의드립니다. 그리고 엄마 소원 한 가지, 이건 비밀인데 (제 특기가 비밀이라면서 말하는 거예요 ㅎㅎ) 

엄마는 평생 꼭 한번 해외에서 집짓기 봉사 활동하고 싶어 하세요.  이건 외람된 말 같지만 저는 두 분이 신혼여행으로 해외 오지에서 엄마 소원 성취하며 봉사 활동하시면 어떨까 제안해 봅니다. 멋질 것 같아요. 물론 아저씨는 스마트하시니까 (힛) 엄마 몰래 계획 만들어 놓으시면 엄마 정말 기절하실 것 같아요. 물론 그 비밀을 제가 알려 주었다고 그때 말하셔도 되고요. (저도 엄마한테 공로 협조상 받고 싶어서 ㅎ)


그리고 엄마에게 "고맙다, 수고했다, 참 잘했어" 이런 말  많이 하시면 되게 좋아하세요. 저에게도 어릴 때부터 자주 하시던 말이에요. 저는 그 말 먹고 자랐어요. 그래서 저는 친구들한테 제 별명이 땡순이에요 땡큐를 많이 해서 애들이 붙여준 거예요. 저는 미국 가서도 땡큐만 하고 살 거예요. ㅎㅎ  어쩌면 엄마가 옛날 아빠한테 그 말을 듣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그 말을 많이 하고 사시는 것 같아요.  훗, "청국장처럼" 이 가게도 옛날 나쁜 기억들 영향이 커요. 그리고 엄마는 강압적이고 독단적인걸 싫어하세요 그것도 왜 그런지 아시겠죠? 항상 서로 의견이 다르면 아저씨 생각 먼저 말하고 엄마 의견 물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또 엄마는 아직도 소녀감성 가지고 있답니다. 계절이 바뀌면 그 바뀌는 사이를 좋아하세요. 새싹이 막 올라올 때, 낙엽이 막 떨어질 때, 첫눈이 내린 날 이런 날을 골라 프러포즈하세요. 힛


저는 아저씨를 지지합니다. 엄마가 재혼하면 아빠가 두 명 되겠지만 동생도 생기고 혹시 제가 결혼할 때 제 손 잡고 신부 입장해주시면 정말 행복하겠죠.(옛날 아빠는 제가 설득할게요)  요즘 신부 입장에 혼자 들어가는 경우가 많던데 저는 아빠 손을 꼭 잡고 싶어요.  나를 책임지던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남자에게 넘기는 장면, 저는 그게 너무 멋있어요. 사나이들의 결연한 포로교환?  황야의 협정? 뭐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제가 부부 싸움하면 제 편이 되어줄 아빠가 전하는 무언의 압력?  이런 것도 느껴요. ㅋㅋ


아저씨

전 이제 떠납니다.  이 편지 보실 때쯤 제가 이륙해 하늘에 있겠지만 저 생각하며 읽어 주시고, 다시 만날 땐 두 분 결혼식에서 만나고 싶어요. 프러포즈 잊지 마시고 꼭 멋있게 해 주세요.  엄마는 전에 프러포즈 안 받았데요.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좋아합니다^^

                                                            


                                                                         2019. 8.7 정인 드림     


  * 마지막 회였습니다. 조회, 구독과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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