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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Apr 15. 2020

그가 나를 졸로 보면   조용히 ㅇㅇ하라

"졸로 본다 이거지?"


한국 언론에서 근무했던 선배는 나보다 사회생활 경험이 많아 그에게 자주 사람에 관해 질문했던 것 같다.  

미국을 비슷한 시기에 들어와 그런지 세상을 리딩 reading 하는 것도 비슷했지만 선배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평가가 나보다 탁월하게 앞섰다.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 판단하는 그의 어떤 평가는 맞고 가끔은 틀리다.


그가 잘 쓰는 말 중에 하나가  "졸로 보인다"였다. 둘 다 한국의 메이저 리그 사회 살다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주류사회에 깊이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한인사회에 편입되기 싫은 애매한 두 겹의 경계에 살다 보면 매사가 예민해진다. 그래서 "졸로 본다"는 말은  치열한 사회의 느낌을 잘 아는 언론인 선배의 자기 유행어였다.


"졸로 보인다"는 것은 모두가 알듯 "장기판의 졸"을 말한다.


나 같은 장기 초보자도 졸은 시작할 때 총알받이로 상대에게 먹혀주거나 한 칸 옮겨 전투를 시작하는 길을 트는데 쓴다. 그에 비하면 차나 포는 매우 중요한 타격수단이며 승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말이다. 물론 끝까지 살아남은 졸이 궁을 잡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사士 와함께 소기물로 구분된다.

 

장기판의 졸처럼 상대에게 우습게 취급당하는 상황은 살면서 누구나 겪는다.

졸로 보이는 경우는 주로 힘(돈)과 관련해 발생한다. 잘 나가다가 어떤 이유로 낙마했거나 건강을 잃거나 실직했거나 은퇴하면 바로 졸로 보인다.


그(그녀)가 나를 졸로 보면 당신은 금방 그것을 알 수 있다. 당신이 졸로 읽히는 순간은 상대가 자기 이익이 없다고 판단한 순간이다. 여자가 남자를 졸로 볼 때는 대부분 사랑이나 관심이 떠났을 때고 동성끼리 졸로 취급당하면 더 이상 사용가치가 없다는 의미다.


졸로 보이는 보통의 행동은 소통의 속도에서 발견된다.  문자를 보고 바로 응답 안 하는 경우나 리턴콜이 하루정도 지나서 올 때, 만나자고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거나 무대응 하는 경우, 그들이 당신을 졸로 본 증거다.

또는 친구들 앞에서 면박을 당하거나 술자리에서 가시 돋친 농담을 듣고 집에 가 생각하면 그 말이 아프게 느껴질 때도 그렇다.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생각한다면 아직 당신이 졸을 경험하지 않아서 그런지 모른다.)


개인 성격상 휴대폰을 송신용으로만 쓰는 사람도 있다. 수신은 잘 안 하고, 해도 아주 나중에 연락 준다.  이런 사람은 애초부터 게으르거나 자기 관리가 안 되는 사람 혹은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아니 옛날에는 꼬박꼬박 잘 응대하다가 요즘 느려지면 그가 당신을 졸로 보는 그 순간 일수 있다.


졸로 취급되면 기분이 어떤가?  


"옛날에 설설 기던 놈이 지금은 우습다 이거지?" 보통 불쾌하다.


그러나 컴다운(Calm down ;발음 때문에 come down으로 오해 말아야. To become calmer, to make a situation calmer다) 하고 처리해야 한다. 또한 나도 상대를 그날부터 졸로 생각하고 태도를 정리하거나 안 보면 된다. 다른 하나는 조용히 정리하는 것이다. 조용히 정리한다는 것은 상대가 눈치채지 않게 마음에서 내보내는 것이다.


어느날 육신의 예수 아빠 요셉 정혼한 약혼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성경은 이 상황을 비교적 소상하게 묘사한다. 이 사건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사람은 요셉이다. 유태인 율법에 돌로 쳐 죽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을 기록한다.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다."

 (여기서 기독인 혹은 타 종교,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를 고려해 신학적 논의가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도 없었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다.(마 1:19, 공동번역)


후에 요셉은 그 일을 생각하다 잠이 들고 꿈을 꾼다.  "@#$%%^&*!@......." 말을 듣고 아내를 데리고 온다.   

이건 종교의 이야기다. 믿음으로 읽으면 신앙적 해석이 무수히 쏟아진다. 그러나 "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만 꺼내서 사용해 보면 제법 현대를 살아갈 지혜로운 교훈을 얻는다.


부부싸움 자주 하는 사람, 그 이유가 뭔지 궁금하실 게다.


그 답은 "드러내어 시끄럽게" 직선만 사용해서 그렇다. 대화에는 곡선과 축약, 메타포도 필요하다.

그런데 직선으로 빠른 강속구만 쓴다. 이유가 뭘까? 사랑이 변해서 그렇다.


사랑은 생물이라 원래 유통기한이 짧다. 그래서 전환 동작이 필요하다. 골프에서 탑 스윙하고 트랜지션 transition 동작 후 다운스윙으로 가지 않으면 스윙은 완성되지 않는다. 만약 탑에서 골프채 들고 가만 계속 서 있으면 그것을 스윙이라 부르지 않는다. 사랑이 변하는 것인지, 유효기간 다하면 썩는 것인지 모르면 사랑이 없다고, 식었다고 오해한다.  우유도 놔두면 썩고 저으면 리코타 치즈를 만들 수 있다. 사랑은 변해야 되는 생물이다.

계속 변하지 않고 사랑하면 그 사랑은 죽은 박제일 수도 있다.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를 사용하면 대화든 삶이든 좋은 것이 많다.  아내에게 꽃을 선물한 적이 있는가? 드러내지 말고 가만히 꽃을 사서 줘보라. 그날 밤 당신은 황제로 즉위할 것이다.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본 적이 있나?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준비해서 짠 하고 열어라 (아, 냄새가 걸리니 외출 보내고 모르게 해야 한다) 그날 밤 남편은 당신을 여왕으로 섬길 것이다. 말이든 행동이든 직선 말고 곡선을 사용해 살아보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 우유로 치즈 만들 때도 곡선으로 젓지 직선으로 하지 않는다.


혼자 사는 사람은?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자기를 믿어라. " 난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그날 밤 당신은 술선에  취해 잠들게 될 것이다.


제목처럼 "조용히 정리하라"는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상대에게 티 내지 말고 마음으로 정리한 뒤 당신이 그를 평가할 일이 있을 때 졸로 만들면 된다. 그런 날은 반드시 온다. 가혹하다고? 웃기지 마라 사람들은 더 치사하게 세상을 산다. 그들은 이익이 사라지면 친구고 뭐고 멱살 잡는다. 백성은 애정을 담아 그에게 투표하고 조금 잘못되면 지지하던 그를 투표함에 꾸겨 넣어 버린다. 그것이 사람이고 나다. 세상을 성자처럼 살려고 하면 늪에 빠진다. 우리는 성인이 아니라 범인이다.   

자신의 인격과 고요한 삶을 위해,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 뭐든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좋다.





노인이 있었다.


그는 서울의 최고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옛날 옛적에 미국에 건너왔다. 학력뿐 아니라 젊어서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한국 최고 기업의 창설 멤버 이기도 했다. 요즘 말로 거물이다.   


미국에서 그와 함께 몇 년을 의기투합해 일을 추진했다. 그는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하며 정보에 대한 분석이 뛰어났다. 그런데 그는 이중적이며 교활했다. 결국 그와 헤어졌다. 그 긴 이야기는 짧은 지면에 담을 수 없지만 결론은 그가 나를 이용한 것이다. 아니 졸로 본 거다.

 

사람을 졸로 보는 사람은 젊은 철학자 스벤 브링크만이 그토록 강조한 "모든 것에서 쓸모를 찾는 도구화"의 문제에 대해 성찰이나 정리가 안된 사람이사는 일에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 이기도 하다.


2017년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미래 인조인간과 인간의 이야기다.

이 영화는  디스토피아적 미래사회의 색과 상징, 통제, 기억, 기술, 인종을 뛰어넘는 혼합 사회 등, 무엇보다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한다. 여기 등장하는 인조인간은 인간 입장에서 보면 전부 졸로 보이는 도구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처럼 생각하고 삶을 고민한다. 인간성이 사라진 2049년 저런 세상이 온다면 별로 살고 싶지 않다. (선거 마치고 꼭 찾아보시기 바란다. 웹 서핑하면 쉽게 찾아진다)


정리하자면, "그가 나를 졸로 보면 조용히 정리하라."

계절이 바뀌면 옷을 정리하듯 "정리의 신" 곤도 마리에가 "설렘을 주지 않는 옷은 버려라"로 세상을 정리 해 버리듯 인맥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로 사람을 무겁게 메고 살 필요는 없다.  올봄에, 나를 졸로 보는 것들의 이름에 더 이상 설렘이 없다면 과감히 지워 버려라. 그도 당신을 찾지 않거나 당신 이름이 그의 휴대폰에서 이미 지워졌는지 모른다.


타인과 심리전에 에너지 너무 쓰지 말고,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생명의 찰나에 자신을 몰입하게 하는 것은 어떨까?  
봄의 길목에서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이 글도 브런치 가두리 양식장에서 뛰쳐나가 많은 사람이 보면 좋을 텐데. 어떤 글은 뛰쳐나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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