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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Mar 08. 2021

나에게도 찾아올 죽음

죽음은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온다.


 눈치라도 주면 각오라도 할 텐데, 그것은 그처럼 갑자기 온다.  

 친구가 출근길에 차량 충돌 사고를 당했으나 죽지 않고 살았다. 사고가 수습되고 한참 병원에 입원해 말을 틀 때쯤  " 쾅! 하는데,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했어. 순간, 내가 빤스는 새 거 입고 나왔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 그가 살아 있어서 잔잔한 웃음이 오갔다. 그는 퇴원하자마자 속옷을 전부 새것으로 바꿨다.  

 

 아끼던 후배가 주말 오수를 자기 집에서 즐기다 갑자기 죽었다. 그는 음주, 흡연, 과체중, 기저질환과 거리가 먼 아주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갑자기 떠나자 나는 아물지 못할 상처만 얻고 갑자기 찾아온 죽음에 대해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서.  


 미국 중부의 작은 마을에 살 때 새로 알게 된 한인 부부가 있었다. 하루는 그들과 식사와 차를 나누며 늦은 밤까지 유쾌한 담소를 나누고 마침 그때 정말 소담스럽게 함박눈도 내려서 그날 벗이 있어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다음날 그들은 가족들의 걱정을 뒤로하고 비즈니스 여행을 자동차로 떠났다. 출발하고 반나절쯤 지났나, 다른 주 state로 들어 선 순간 눈길에 미끄러진 트럭이 그들의 승용차를 덮쳐 종이처럼 구겨 놓았다. 아름다운 밤이었던 어제와 같은  오늘 그 시간,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부부는 병원에서 함께 운명했다. 그들은 몸이 너무 심하게 망가져 관 뚜껑을 닫은 채 미국스럽지 못한 장례를 서둘러 치렀다. 내 마음이 오랫동안 힘든 것은 죽음 전날 그들과 함께 있어서였다. 그날 이후, 나는 죽음에 대해 왜? 냐고 신에게 묻지 않고 원망도 하지 않았다. 죽음이 신의 영역이 아닌 것을 알았다.


 죽음을 앞둔 사람과 갑자기 이별하는 사람을 자주 보다 보니, 나는 내 죽음도 자연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죽음이 산업이 되고 돈이 인간의 고상한 죽음에 끼어들자 우리는 차분하게 슬픔을 마무리할 시간이 없어졌다. 결혼 대행사가 행사로 진행하는 결혼식이나, 상조회사에 맡겨진 장례식은 똑같다. 남은 자들의 여백은 없다. 어쩌면 평균수명을 10년쯤 더 살게 된 교만한 인류는 죽음이란 혐오스 단어를 문명사회에서 지우고 싶은지도 모른다. 아쉬움도 상처도, 서로 간의 원망과 원한에도 쉼표가 필요한데 망자를 서둘러 보내면, 남은 자는 서둘러 죽음을 지운다. 사랑하는 이를 운명에게 빼앗겨 추억을 지우기 힘든 남은 자는 아주 긴 세월 홀로 헤쳐가야 한다. 추억의 예리한 칼 끝은 마음 벽에 기억을 새기려 심장엔 붉은 피가 튀고 머리는 그 통증을 참는다.  기억 새김의 출혈이 멈추면 비로소 망자의 사진을 보고 웃을 수 있다. "곧 갈 테니 기다려" 이 말도  읊조린다. 혼자 걷는 그 터널은 참 길고 참 어둡다.


 차가운 냉동 백신에죽을지 모를 공포 차갑게 담겨있다.  내가 사는 일리노이주는 곧 50대 이상 차례가 온다고 휴대폰 뉴스 알람에 기사가 떴다. 혈압약 끊은 지 6개월, 권고하는 모든 것을 하고 있지만  약 먹을 때처럼 130/85 근처에 머물지 못한다. 150/100이면 활짝 웃는다. 그때마다 만지작 거리는 혈압약 재복용 카드, 그때도 의사는 약의 부작용보다 혈압이 높아서 생기는 위험이 더 크기 때문에 혈압약은 먹으라고 했다. 백신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한다. 맞는 말인데 정부도 의사도 사실은 내게 관심이 없다. 나는 숫자고 차트에 있는 환자 손님이다. 고혈압은 내 혈압이라 내 책임이고 백신 맞다 죽으면 기저질환자고 나는 한국 통계 숫자가 아닌 미국 통계 숫자다.  그래도 죽음의 이유라도 알고 죽으면 다행이다.          

        


 

 비행기는 아주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선배와 나는 오랜만에 세인트루이스에서 휴스턴으로 골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버킷리스트

<프로골퍼처럼 3박 4일 시합하기>를 성취한 것이라 원 없이 즐기고 오던 길이었다. 골프장 호텔의 정갈하고 새하얀 침대 시트( 난 이것을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격을 갖춘 멋진 식사, 아름다운 자연의 냄새, 친한 사람들, 이것을 충분히 즐기다 이쯤 면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윙, 우웅, 우웅" 분명 정상적인 엔진 소리가 아니었다. 기체는 몹시 흔들렸고 시커먼 구름은 못되게 생긴 자기 얼굴을 창문에 바짝 들이댔다. 나는 착륙에 애먹는 조종사를 느낄 수 있었다. 옆자리 선배는 천하태평이다. " 왜 무서워?" 긴장한 내 얼굴 보고 육군 병장 출신 선배는 공군 장교 출신을 비아냥 거렸다. " 아, 지금 좀 위험한 거예요" 무식이 용감이라고 한국을 자주 오가던 선배는 미국 국내선 비행에서 무슨 사고야 나겠냐는 말투로 나를 놀렸다.


 내 예상은 맞았다. 항공기는 복행 Go around을 시도했다.  다시 착륙절차를 하고 뇌우를 동반한 강풍에 소나기를 겨우 이긴 뒤 겨우 비행기는 안전하게 착륙했다. 대부분 승객은 영영 하늘에 있게 될까 근심하다 땅에 온 것에 고무되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물개 박수를 쳤다. 기장도 기쁨에 들떠 약간 흥분한, 낮고 빠른 영어로 위험한 상황을 설명했다. 그 와중에 선배는 사람들이 유난 떤다는 식의 표정으로 자기 물건을  챙겨 서둘러 나갔다.(자기가 틀린 걸 알아서) 나는 비행기 탈 때마다 두 번, 죽음을 맞이 할 기도를 드린다. 

 이륙하기 전과 착륙하고...



 난 아직  내가 젊다고 생각하지만 늘 죽음을 준비하고  산다.


 어릴 때는 종교적 세뇌로 죽음에 대해 무지했었다. 세상을 조금 이해하고 삶을 약간 관조하자 " 죽음은 벽인가 문인가?" 하는 질문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요즘 세상이 주목하는 상업화된 웰비잉, 웰다잉에는 관심이 없다. 죽음에 대한 정리는 아주 긴 이야기라 지면이 짧아 그렇고, 부족하지만 가벼운 의견을 드리면,     


  나는 참 좋은 것을 매일 느끼며 이전보다 더 깊이 경험하려고 노력한다. 

 어릴 때는 생각 못한 일이다. 감각을 집중해서 삶의 섬세한 전부를 진심으로 느끼고 감사하고 즐긴다. 예를 들어 커피 한잔을 만들 때, 정성을 다해 원두를 사고 진중하게 원두를 갈고 탬핑도 신중하게 한다. 만들고 나면 커피 열매에게 감사하고 커피 온도도 한 템포 기다려서 정확한 타이밍에 첫 잔을 마신다. 우주가 내 안에 밀려 들어온다. 아무튼 그걸 느낀다. 커피도 그렇고 음식 맛도  단. 짠. 신. 쓴. 감칠맛을 (더 늙으면 그걸 못하니까) 감각적으로 즐긴다. 삶의 맛이 고작 돈맛, 명(명예) 맛, 권(권력) 맛뿐일까? 삶도 다양한 맛이 있어 보인다. 나는 그것을 찾는다.


 온도가 식으면 커피는 맛이 없다. 

 삶의 온도도 수시로 변한다. 행복 더운 맛이라면 불행은 차가운 맛이다. 삶은 사인 곡선 sine curve처럼 수시로 변한다. 부자일 때가 있고 망할 때가 있고 어느 순간 삶은 부메랑처럼 자기도 공격한다. 돈문제가 아니라도 행복할 때와 불행할 때가 교차한다. 살아보니 삶은 우연을 촉매로 사용하고 노력이 전부가 아닌 것 같다. 노력은 학창 시절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고 교문을 나오는 순간 지혜가 더 중요한 삶의 동력이라 느낀다.

 

 나는 일하다 커피 온도가 식으면 얼음을 넣어 냉커피로 마신다. 달달한 게 그리우면 그냥 우유 넣고 시럽 타서 라떼처럼 마신다. 거품 내고 그렇게 애쓰지 않는다. 삶도 그리 애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닌 것을 깨닫고 그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살아있는 순간이 찬란하다고 느낀다.

 어쩌면 나의 여러 가지 죽음 준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살아있는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그래서 요즘 같은 고속 사회에 속하고 싶지 않다. 독자들과 나눔은 이 글을 읽는 소수의 사람이 적어도 나보다 훌륭한 수준과 깊이를 가진 분들이라 믿기에 그들과 최소한 소통하는 것일 뿐, 사회 활동은 아니다. 내가 창업한 회사도 나는 설계자이지 실질적 주인은 젊은이라 생각하고 지름길로 인도하고 싶어 시작했다. 사회에 속하지 않고 고유한 나만의 세상을 창설하고 그 안에 살아가는 일은 고립이 아니라 더 넓은 영토를 갖는다. 그 세상은 고양된 정신의 영토를 가진 다른 이들과 연합함으로 확장될 수 있다고 본다.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 더 순수하고 찬란한 세상을 맛본다.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방법은 방송이든 지면이든 언론을 끊는 일이다.    


 갑자기 죽음이 찾아올 때 의식이 있는 몇 초 혹은 몇 분 동안 내가 마무리할 생각도 준비했다.

 사람들은 죽음이 매우 낭만적이라 생각하는데 죽음의 순간을 자주 목도한 나는 죽음을 전쟁터라 생각한다. 죽는 순간 호흡이 엉켜 세상을 이륙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돌연사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부럽다. 죽음은( 자살, 타살, 사고, 노환 등 죽음의 시간이 길든 짧든) 아까 말한 사인 곡선처럼 롤러코스터 닮았다.


  "두두두~우두두두~ 아, 아악~ 꺄악, 꺄악~ 우두두두~두두두~ 쿵"


 죽음의 인식은 의식이 있을 때 공포나 두려움을 뇌가 느끼는 것인데 죽는 순간에는 그럴 여유가 없다. 죽음은 생명계에서 실종되는 순간이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담담해지는 훈련이 아닐까? 마지막 , 그 순간이 지나면 신께서 나를 깨울 때까지 아니면 영원히 나는 없다. 나는 세상과 안녕을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죽음을 설계한 그것이 초자연적 고민 끝에 결심한 좋은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드르렁, 드르렁, 아들이 코를 골고 잔다.


 그는 젊지만 과로에 수면부족, 고혈압 환자다. 벽이 나무로 지어진 미국 주택 구조상 방간 소음은 견디기 힘들다. 어제도 새벽에 퇴근하고 이른 아침인데 출근 알람이 울린다. 돈을 많이 벌면 시간은 가난하다. 알람은 아주 오랫동안 꺼지지 않았다. 얼마나 피곤할까? 요즘 불면증에 시달리는 나는 그의 꿀잠이 부러우면서 안쓰러웠다. 그를 제외한 모두가 알람 소리로 잠을 깼다.


 걱정스럽게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 데이빗, 데이빗! 일어나 봐"


알람은 계속 울리고 아직도 그는 조용하다.


문을 더 세게 두드렸다.

 

"네,.. 저 일어나요"


 아, 그래.

 휴, 살아있구나...                     


  

새가 알을 품듯 굴하지 않고 삶을 품어야
죽은 후에 문을 만나지 않을까?

https://youtu.be/eP0_xUfPM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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