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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Aug 19. 2021

삶의 미숙함 그리고 진정성

  내 글을 기다려주고 정성스레 읽어주던 몇 안 되는 그들이 마음에서 나를 불렀다.


"글 좀 쓰지?" 호령 같은 음성에 화들짝 놀라 새벽에 잠을 깼다. 꿈은 두서없는 여러 장면들로 뒤섞여 내 글처럼 모호한 정체성을 띠고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꿈의 마지막 장면은 내가 고속버스에서 사람을 때리고 있었다. 동이 트고 꿈의 파편들이 기억에서 사라지자 글을 쓰지 않는 자신에 대한 자책이 이성에서 밀려들어왔다. 그래서 오늘 나는 어렵게 글짓는 판 앞에 앉았다.  



 

시카고 출신, 따뜻한 배우 로빈 윌리암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아주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런데  며칠 전 그를 소재로 다룬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그의 아내 인터뷰가 나왔다. " 그래도 우리는 살면서 삶의 미숙함과 진정성을 함께 나누었지요 " 번역이지만 나는 그 단어가  듣기 좋았다.


" 미숙함과 진정성 "

                                                               



 어려서부터 나는 수줍음 많고 남 앞에 서는 것을 싫어했다. 어른이 되자 난 대중 앞에 서는 직업을 가졌고 남들은 끝내 내 진짜 성격이 내성적인 것을 모르고 지냈다. 어렸을 적 어머니가 파란색 양말을 신겨 학교에 보내면 나는 하루 종일 눈에 띄는 그 특별한 남다른 색에 부담을 느껴 하루 내내 불편하게 지내다 집에 오면 제일 먼저 양말을 벗어던졌다.  학교 야외화장실에서도 짓궂은 친구들의 장난을 피해 학교  화장실은 아예 가질 못했다. 그 결과 큰 것을 참다 집에 와서 바지에 실례한 적도 있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어려서부터 삶의 미숙아였다.


 삶의 미숙함은 조직사회의 뿌리를 가진 한국에서 조직의 선임이 되면 능력에 관계없이 갑이 되는 구조 때문에 나는 내 미숙함을 손보지 못한 채 성장했다. 나이가 들어 자신을 다듬고 좀 더 세련된 인격이 필요할 즈음 비로소 나는 먼저 내 삶의 미숙함을 내 면전에서 직시하게 되었다.


 그 지점엔 자유함과 절제의 혼돈이 있었다. 내 진정성은 순진함의 대명사였고 순진함은 어리석고 약지 못한 세상 루져의 외형인 것도 알게 되었다. 뒤늦게 덜 약아빠진 자기 정리를 시작했다.  내 인격 정리의 목적은 주변 사람이나 타인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지구 생활에서 나 자신이 불편해서였다.        


     


 

 몇 년 전 한국에서 지낼 때도 그랬다. 나는 이상한 영어 하는 한국인을 은근 깔보고 은연중에 후진국 사람 대하듯 상대했다. 돌이켜 보니 강남 사는 졸부가 강북에서 으스대는 모습이었다. 그때는 대중교통을 난생처음 이용하며 지내던 때였다.  

 하루는 인천 계양에서 형이 운영하는 병원 진료를 받고 일산으로 가는 좌석버스를 탔다. 버스는 만원이었고 내가 아는 상식에 좌석버스는 입석을 태우면 안 되는 것인데 인파는 출구 계단까지 가득했다. 시간이 다소 늦어 그런지 식사나 회식을 마치고 옷과 머리카락에 배인 음식 냄새, 술냄새, 땀냄새, 먹고살기 위해 하루를 고되게 보낸 서민 냄새가 새는 도시가스 냄새처럼 공간에 가득 차 있었다.

 

 얼마 안 가 지옥 버스는 자유로에 들어섰고 당분간 정차하는 정류장이 없어 만원 버스는 그나마 자유로왔다. 그때였다. " 우욱..." 바로 내 앞에서 벌어진 광경은 난생처음 보는 처참한 것이었다.  내 앞의 남자가 중간 출구 아래 계단에 서 있던 젊은 여성의 머리 위로 그날 먹은 것을 다 토해내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냄새가 진동하며 긴 생머리의 여성 머리 위에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문제는 그 상황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이었다. 술 취한 가해자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입을 쓰윽 닦더니 승객 사이로 사라졌고, 누구 하나 이 문제에 끼어들지 않았다. 피해자인 젊은 여성은 기가 막힌 지 말없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조각처럼 굳어 있었고 악랄한 침묵은 계속 흘렀다. 결국 성질 급한 내가 소리 질렀다.


" 기사 아저씨 차 세워욧!!!"



 

 젊어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갓 임관한 초급장교 시절 고속버스에서 난동을 피우던 술 취한 남자를 제압했었다(아니, 때렸다). 지방에서 서울 가는 야간 고속버스에서 술 취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에 오줌을 누려고 바지를 내렸고 승객은 소리 질렀다. 여성 승무원이 달려 나왔고(한때 고속버스에 승무원이 있던 때가 있었다)  승무원이 그의 행동을 제지하자 그는 그녀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 상황을 보던 난 더 이상 파란 양말의 어린이가 아닌, 의협심에 불타는 진짜 사나이였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의자에 다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안전벨트를 풀지 않았다. 나는 다시 일어나 순식간에 이단옆차기로 그를 날려버렸다. 우당탕 통로에 그는 대자로 쓰러졌고 한 번 더 복부를 세게 밟은 뒤 기사에게 달려 나갔다.


 "아저씨! 차 세워욧!!!"


                    



 일산으로 가던 만원 좌석버스는 내 볼멘소리를 듣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기사가 나와 보더니 기가 찬 모양이다. 누가 이런 겁니까? 누가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놈은 차 세울 때 내려서 도망갔다. 피해자는 그때야 비로소 머리와 얼굴을 닦았고 하나 둘 주변의 여자들이 도와주었다. 나는 화를 내며 기사를 나무랐다. "아저씨가 사람을 너무 많이 태우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 아닙니까?" 기사는 말없이 봉걸레를 들고 와 출구 계단을 닦으며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보상을 원하면 연락을 달라고 말했다. 그때 뒤에서 한 아주머니가 크게 소리 질렀다. 


"이봐요, 이 버스가 자가용입니까?
다른 사람  생각도 해야지 빨리 출발하세욧!!!"


 내 성질에 내 입에서 욕이 고드름처럼 달려 떨어지는 순간,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대화가 안 되는 사람하고 싸우면 그다음 챕터를 알기 때문에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그 사건을 생각하다 내 성격의 미숙함을 발견했다. 좀 더 예의 바르게, 좀 더  매끄럽게 문제 해결하는 방법이 많았을 텐데...


 



 고속버스 여 승무원 때린 그놈을 처벌해야 했다. 중간에 차를 못 세우면 도착해서 경찰을 부르자고 했다. 그놈은 통로에 그대로 누워 가고 나머지 승객은 안정을 찾았다. 한 시간쯤 지나 버스가 강남 고속터미널에 도착 내가 제일 먼저 앞서 내려 경찰을 부르겠다고 하자 기사가 말했다. "저, 손님, 복잡하게 가지 말고 그냥 넘어가시죠? " " 무슨 말씀이시죠? 당신 직원이 구타를 당하고 피해를 입었는데요?" 그 기사는 승무원에게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 김양, 괜찮치?" 얼굴이 벌겋게 부은 그녀는 고객을 끄덕였다.


 승객이 모두 내리고 바지가 오줌으로 축축하게 젖은 놈도 군복 입은 날 한번 쓱 쳐다보더니 머쓱하게 내린다.

 

 그날 나는 의문의 폭력배였다.



 

 돌이켜보면 내 삶의 미숙함은 내 삶 전체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미숙함 때문에 내 삶의 길이 바뀌기도 하고 큰 손해를 입기도 하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그 미숙함이 성숙함으로 바뀌는 순간도 있었다. 그 성숙함으로 삶이 주는 아름다움의 깊이와 가치를 맛본 적도 많았다. 하지만 내 미숙함은 그 안에 숨겨진 진정성이 미숙하게 행동하며 얻어진 것임을 느낄 때도 많다. 진정성은 순진해 보여서 과소평가되지만 진정성을 성숙하게 표현하며 사는 지혜가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한다.


나는 아직도 삶에 미숙하다.

하지만 미숙한 내가 진정성을 잃고 손익계산에 야무진 똑똑한 사람이 되긴  더 싫다.        


https://youtu.be/s_-WYGOiH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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