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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Sep 18. 2021

삶의 두 얼굴

 한국은 가을장마에 태풍이 지나갔다는데...


 코로나 시카고는 매일 확진자 수만 명이지만 그냥 사람 사는 여름이다.  이 나라는 코로나 시국에도 국가라는 정신적으로 통제된 가두리에서 정치, 경제, 사회, 윤리, 문화, 국방, 범죄를 공유하며 무의식 간 집단의식을 강요받고 사는 것 같지는 않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우리 동네 주변에 경찰이 총 맞아 죽고, 경찰은 또 범인 같은 사람들을 죽인다. 도시는 이 처럼 두 얼굴을 가지고 낮엔 white America 밤엔 black America, 또 그렇게 매일 무심하고 둔감한 척 하루가 굴러간다.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이들에 비하면 우리는 나라가 예민하고 개개인도 예민해 보인다.


 그래도 시멘트에 갇혀 사는 모습은 어디나 매 한 가지다.  이곳 도시도 한국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아 낭만스럽지 않다.  화려한 시카고 빌딩 건축 예술에 흠뻑 젖었던 그 감동은 금방 식어 이미 평범해 진지 오래고 외국을 여행으로 보는 것과 살아보는 것의 차이는 연애와 결혼만큼 낙폭 큰 또 다른 두 개의 얼굴이다.

 

 삶도 그랬다. 놈은 항상 두 얼굴로 나를 대한다.


 도시생활에 지쳐갈 무렵 한국에 사는 동생은 오랫동안 고민하고 실천에 옮긴 농가주택을 1차 수리 한 후 부분 입주 해 시골 생활을 내게 전해 주었다. 항상 동생의 시골에는 어릴 때  낯익은 흙냄새가 난다.


" 오빠, 웃기는 거 알아? 포크레인이 배수관 공사하다 수도관을 건들어서 터졌지 뭐야?
그 불행 덕에 부동전이라는 얼지 않는 야외수도로 교체하는 행운을 얻었는데 예상 못한 분이 찾아온 거야"
"누구?"
"청. 개. 구. 리!"


이 작은 녀석이 매일 수도꼭지에 앉아있어. 아마 더울 때 수도관이 시원한가 봐. 녀석이 어떻게 이 높은 곳에 올라온 건지 신기해. (나중에 보니 빨판 발로 기어오르더란다) 이젠 내가 물 쓰러 나가도 도망가지읺아.  이름은 "헤이, 청 반대"라고 지었어, 청개구리, 반대 쟁이로 유명하잖아? (바보 동생은 실험도 했다. 내려가게 하려고 반대로 말했단다. "거기 그냥 있어" "..." ) 그리고 있잖아, 뒷마당에서 뱀도 만났어. 인터넷 찾아보니 유혈목이더라  정말 무서웠어. ( 매부는 뱀을 쫓아내려다 실패해 결국 죽이고 말았다. 그는 뱀을 앞마당에 묻어주고 지금도 죄책감에 시달리며 변기를 열 때마다 다른 뱀 가족이 복수하러 왔나 두려워한단다) 동생은 시골이 개고생 이라더니 좋은가보다, 아니 좋은 척하는걸께다. 그들은 기본 공사만 업자에게 맡기고 서까래 도색부터 천장 퍼티 작업, 주방 타일공사까지 가족의 힘으로 해냈다. 시간 나면 종알종알 투정 섞어 한 달 동안이나 보고 하더니 결국 해내고 말았다. 참 대견했다.


삶도 그렇지.  시간이 흐르면 무언가는 맘에 안 들어도 이루어지고
지난날에 삶의 두 얼굴도 보게 되는 것 같다.

 "원치 않는 파도로 위기를 만나기도 하고  서퍼처럼 파도를 기다리며 즐길 때도 있었지. 아마 네가 죽음을 앞두고 관 두 개만한 싱글베드에 누워 가느다란 정신줄 잡고 온몸을 사용 못할 무렵이면 머릿속에 온통 집 고치며 개고생 하던 그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지루한 삶의 마지막 시간을 때워야 할 게다. 시간으로 돈 벌어먹을 때는 저리 가, 바쁘다 바빠 하지만 시간이 천지에 려 있으면 신대륙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바람 없던 망망대해에서 운 좋게 조류가 신대륙에 데려갈 때까지 ) 시간에 갇혀 신이시여! 차라리 죽여주소서, 죽음의 파도 만나길 매일 기다렸을게다. 삶은 그렇게 두 얼굴로 우리를 조롱하고 인생이란 시간을 적당히 때우게 해 주지."  


그녀가 한참 재잘거릴 동안 나는 잠시 상념에 빠져 들었다.     


  "오빠 나 벌레 무서워하는 거 알지?" 근데 엊그제 집에 들어온 귀뚜라미를 조심스럽게 잡아서 밖에 놓아주었다? 그런데 모기는 또 패 죽여. 잡초는 얼마나 빨리 자라는지 예초기로 한번 잘라 봤는데 그거 일이더라. 누가 그 애들을 잡초라고 불렀는지 그들도 생명인데 누구는 불쌍해하고 누구는 매일 죽여... 도시에선 경쟁자만 죽이면 되는데 시골에서는 불편한 것들은 모조리 죽이는 것 같아.

  



 미국의 한가한 소도시 세인트 루이스 근교에 처음 이민을 갔을 때, 미국집은 전부 나무로 지은 판잣집이었다.  부자 나라가 왜 집을 벽돌로 안 짓고 나무로 짓지? 그땐 우문을 가지고 살았다. 내가 처음 살던 듀플렉스 하우스는 단어 그대로 두 개의 집을 한 개의 주택으로 만들어 렌트하는 가성비 높은 집이었다. 각자 마당이 있고 하나의 이웃만 붙어있는 집. 백 야드 에는  숲이 있었다. 그래도 지인들 덕분에 고급스럽게 현지 생활을 시작한 셈이다.   프트 야드에는 거라지와 주차장, 아이들의 농구대가 있었다.

 

 부지런한 결벽 때문에 나는 항상 주말에는 잔디를 깎고 주변정리를 했다.  집과 환경은 참 좋은데 주변에서 야생동물이 자주 나타나는 것이 조금 신기했다. 숲에는 여우도 살았고 스컹크라고 하는데 ( 난 그놈이 뭔지 잘 모른다) 아기 판다 같고 너구리 같은 놈은 대놓고 동네마당을 배회했다. 하루는 잔디를 깎다가 커다란 뱀을 발견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뱀과 쥐를 무서워한다. 쥐는 반짝이는 눈동자가 싫고- 한국에서 초급장교 시절 둘이 쓰는 BOQ에서 자다가 서생원이 내 코를 건들어 시커멓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마주친 것이 내겐 트라우마였다. 새벽 2시쯤에 동료와 쥐 잡는다고 소리소리 지르며 쓰레빠?로 일격을 가해 해치운 적이 있었다- 뱀은 그놈의 혀가 싫다. 뱀의 혀가 어떤 기능인지 잘 알지만 날름거리는 혀는 남을 모함하고 험담하는 인간의 세 치 혀를 가늘게 빼닮아서 매우 혐오한다.


 뱀은 나를 발견하고도 머리를 든 채  스르륵 우리 집으로 다가왔다. 길이는 1.5m 정도, 굵기는 내 엄지와 검지를 합친 것 같은 중소형 뱀이었다. 혀를 날름 거리며 눈은 나를 응시하는 건방진 놈은 "너 정도는 삼킬 수 있어"하는 교만한 표정으로 내 온몸에 방어 의욕을 일으켜 주었다. 저 놈이 집안에 들어가기라고 한다면 화장실도 침실에도 안심하고 살 수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독사 일지도 모른다. 근처에는 빗자루 밖에 없었다.  우선은 집에서 쫓아낼 요량으로 빗자루로 머리를 툭툭 치며 나가라고 유도해 보았다. 놈은 머리를 세우고 빠르게 덤빈다. 해보자는 거지? 무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거라지로 뛰어가 긴 대나무 하나를 들고 나왔다. 놈은 아직 그 자리에 머리를 내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나가 인마" 한국말로 소리치며 위협하니 영어만 알아듣는지 대체 말을 듣지 않는다. 내리쳤다. 어라 한 대 맞은 녀석은 집의 시멘트 기초 사이의 빈틈으로 도망가 버렸다. 난감했다. 이번에는 휘발유 통을 가져왔다. 틈에다 부었다. 나는 놈에게 화상을 입혀 세상에서 영원히 보내버렸다. 나도 그때 죄책감에 시달렸었다. 죽이느라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다. (나는 겁이 많아서 안과의사가 눈을 치료할 때 눈에 총 같은 것을 쏘는데, 한참을 눈감아 방어했더니 "참 나 여태까지 이렇게 재빠르게 눈을 감는 환자는 처음이네요, 깜박이다 지친 내가 물었다. 다 끝났나요? 아뇨,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자, 눈 크게 뜨고 감지 마세요..." )    


 나는 내 두 얼굴을 잘 안다. 착한듯하면서 잔인한 킬러의 본능이 있기도 하고,  바보 같다가 천재 같기도 하고 이타적인 듯하다가 이기적이기도 하다. 내 두 얼굴은 내 삶과 닮았다.


 어른이 되어 삶의 두 얼굴을 제대로 이해하자 나는 요즘 프로들이 잘 쓰는 그 "즐긴다"를 하고 산다. 어쩌면 나의 지난날은 삶을 아마추어처럼 산 것 같다. 이제 프로페셔널하게 삶의 파도를 서핑할 작정이다.


 삶의 빠르기는 아다지오로 침착하게 두 번 생각하고 타인의 민낯을 만나도 놀라지 않고 차분하게, 나의 민낯이 나를 힘들게 하면 용서해주며 변화하고  때론 둔감하게, 나의 하루를 멈추기 아까운 멋진 식사의 마지막 한입처럼 살아간다.       





       *이번 추석에 아래 영화 꼭 찾아보시길...

https://youtu.be/SgKvP0O0n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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