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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Jan 10. 2022

나의 성지

 세상이 이렇게 뒤집어지기 전 나는 가족들과 종교적 성지를 다녀왔다.


그땐 무리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잘한 일이었고 그 당시 경험으로 내 종교적 정리가 분명해졌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예수"를 구분하는 총기도 얻었다.  "종교는 사회와 같다"는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에게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도, 리처드 도킨스에게 미소 짓는 것도 성지 여행의 선물이다.


성지 순례는 종교적 감흥보다 지리적 신비와 문화적 호감이 더 많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LA공항에 첫발을 내디딜 때도 기분이 비슷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에 진입하는 두려움과 떨림은 압도하는 하늘의 크기와 다양한 차종들이 뒤섞여 달리는 공항 창문 밖 광경으로 막연한 미국이 현실의 미국으로 되는 순간, 스위치, 그것은 성지순례와 닮았다.


 처음 그날, 나의 미국 입성을 환영하고 라이딩해줄 친구는 공항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부인은 수화기 너머 난처해하며 쩔쩔맸다. "정말 미안해요.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질 않는 거야. 지금 막 나갔어요 " 그는 내가 입국심사 마치고 난민처럼 지쳐 갈 무렵 두 시간 늦게 내 앞에 나타났다. 생각해보니 녀석은 천성이 게으르고  계획적이거나 완벽한 성향이 "1"도 없다는 것을 진작 알아보고 체념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걸 나중에 알았다. 나의 미국 첫 번째 셀파(sherpa)는 악연으로 실패 한셈이다. 그때 이후 나는 공항에 나가 사람을 챙겨줄 땐 한 시간 일찍 나가는 버릇이 생겼다.  나의 성지는 그렇게 낯섦과 이어져 있다.



 

요즘 우연히 "마음속 나의 성지는 어딜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성지라기보다 성지와 같이 소중한 곳에 대한 자문자답이었다. 예상치 못한 내 대답은 당황스럽게 "책이 있는 곳"이었다.


 미국의 선배가 새집을 사고 지인들을 초대했었다. 그는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사람이라 자동차든 양복이든 탁월하게 돈을 들여 경악스럽게 치장하고 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서재는 소규모 도서관 같았다. 나는 규모에 놀라지 않은 척 차분하게 흥분했다.


 " 선배, 책이 왜 이렇게 많아요? "


 나는 보물섬 지하동굴에서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미쳐 날뛰겠는데 겉으론 실실 웃고 있었다.


 " 이것도 다 읽으셨나?"


 두꺼운 시리즈 물 앞에서 경탄하자 선배는 대답했다.


" 그건 안 읽었어. 그냥 폼이지 뭐"


 그래, 그의 고급스러운 옷매무새며 bmw700 타고 다닐 때 알아봤다. 겨우 폼 잡느라 책을 그렇게 많이 소장하고 있다 이거지?


 " 이 책 나 빌려도 돼?"  


 "빌려는 주는데 메모지에 날짜랑 이름 적고 한권만 가져가서 반납하면 다시 다른 책 빌려가"


  "흠, 도서대출?"


 나는 그의 규칙을 지켜주며, 폼 잡느라 모아논 책 나무 숲의 수액을 쪽쪽 몽땅 빨아먹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책 좋아하고 글 잘 쓴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마치 이민 가기 전 영어 잘한다는 소리 듣고 살다 막상 미국 도착하니 개뿔, 영어가 안 통하는 충격과 흡사했다. 글짓기로 가끔 상도 받다 보니 작가라도 된 줄 알았다. 사실 몇 년 전, 애견을 잃고 상심한 가족 이야기를 들고 출판사 여기저기를 두드렸다.


"죄송합니다. 보내신 원고 잘 보았으나 우리 출판사와 방향이 맞지 않아 출판이 어렵습니다."


 나는 분노했다. 감히 출판사 따위가 날 무시해? 내가 공부를 얼마나 많이 하고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데 문전박대하다니, 무식이 용감이라고 출판사에 대들었다. 출판사 그녀는 무식한 나를 차분하고 진지하게 응대했다. 투고 작가와 말하는 것이 도리는 아니지만  선생님이 간절히 원하셔서 대답해 드린다며 " 비문이 너무 많고 퇴고가 부족"하다는 병명을 알려주었다.  



 

 나는 죽을병을 깨닫고 치료에 들어갔다. 시간 날 때마다 알라딘에 들어앉아 글쓰기 책과 유명 작가의 글을 공부했다. 그 결과 나는 내가 글쓰기 무식자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 그리고 그때 브런치도 알게 되었다. 또 소설은 장르 로만 알았는데 소설의 상상력과 창의력에 관해 눈을 뜨게 되었다.


 나는 글쓰기 신생아가 되었다.






 오래전 내가 발행한 어떤 글에 잘 붙지 않던 댓글이 하나 달렸다.


"산골에 사는 사람입니다. 늘 작가님 글을 기다립니다".


 내 글을 기다리는 분이 있다는 사실에  많이 놀라고 그분의 그 짧은 문장이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어떤 한 분의 독자 때문에, 신생아는 글을 멈출 수가 없었다. 미국에 귀국해도 한국의 클래식 음악방송과 브런치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바로 얼마 전, 내 통계란에 이전 글을 읽는 몇 분을 보고 내가 독자가 되어 2년 전 내 글을 읽었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글은 주제도 없고 횡설수설, 퇴고도 제대로 못해 우왕좌왕. 많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나는 조심스레 그 글을 수정했다. 추워서 샤워 말고 세수라도 한 듯, 글 전체를 바꾸자니 없애는 것이 날 것 같았다. 결국  부끄럽지만 지난 글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 후 나는 부족해서 브런치에 남았다. 좋은 글을 남기고 싶었고 독자를 의식하는 습관이 생겼다. 영감이 충만할 때 자판에 앉으면 피아노 건반 앞 쇼팽 같은 기분이 된다.  나는 글을 쓸 때 내가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도 내 이야기가 어떨지 궁금하다.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초고를 다 받아 적고 나면 비로소 나는 내가 되어 퇴고하며 나를 분명히 응시한다. 그런 나는 편집자고 교정가고 윤문 하는 사람이다. 그리곤 출판사 사장이 되어 단 몇 분간 브런치 나우의 서재에 무료로 판매하고 곧 사라질 글을 출판한다.


나의 성지는 "글을 읽는 곳"과 "글을 쓰는 곳"이다.


 누군가 "사람은 자기감정을 드러내면 안 되는" 묵시적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나도 다양한 내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울분이든 열정이든 기쁨이든 유머든 솔직하게 내놓고 살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는 감정을 절제하고 표현하지 않는 쪽을 훈련하고 살았다. 공자가 내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 "Nope" 이란 정답 찾은 지는 이미 오래지만 남들 눈에 나지 않고 남들 눈에 잘 보이는 삶은 더 이상 진절머리가 난다.


나는 내 글에서 자유롭고 내 글에서 비상한다. 


인간은 살면서 자기 죽음을 막아보려고 타인을 죽이면서까지 바둥거린다. 정작 죽어가고 있는 자신은 못 본 척 외면하고 영생할 듯 살아가는 것 같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오늘 내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늘이 나의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믿는다.     



내 글은 신생아의 울음소리 같지만
책의 숲, 나의 성지에서
            우렁차게 울다 내 삶을 마치려 한다.           

            

https://youtu.be/Ph5COzxsZ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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