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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Feb 16. 2023

하차

 깜빡 졸았다.

 오랜만에 차를 두고 시카고 시내버스를 탔는데 평소 같지 않게 깜빡 잠이 들어  내려야 할 곳을 한참 지나쳐 버렸다. 여기서는 하차알림이 내리는 지명만 짧게 방송해  정신 차리고 내려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깜빡 꿈에 한국 itx기차를 타고 있었다. 지나간 한국의 전원생활이 기억에서 꿈으로 생생하게 걸어 나와 활보했다. 

그땐 한국의 시골생활이 낭만적이기도 하고 고립된 북극기지 같기도 했다. 시골의 낭만은 "사실이나 사실과 다른" 두 얼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국 대중교통에 익숙하지 않던 내가 유독 기차여행을 좋아했던 것도 기차를 타면 밖으로, 도시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골은 불통이고 도시는 소통이었다.


 그날도 시골집엔 길고양이 사료 한가득 챙겨놓고 쳐다보지도 않는 냐옹이들에게 유쾌한 인사를 던지고 새벽 택시로 역에 나가 기차표를 끊었다. 나의 시골탈출은 늘 그런 루틴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 아침 역에 도착하면 기차표를 사고 아침 백반한상을 먹었다. 한국-미국을 비행기로 다닐 때 늘 예약하면 시간에게 구속되어 수갑 채우고 사는 것이 싫어 기차표는 자유롭게 늘 현장에서 구입했다. 시골역전의 " 여기 백반하나요"도 무척 좋았다. 반찬은 딱 한 번 먹으면 사라질 적은 양이지만 9첩 반상정도 나왔고 따뜻한 국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이밥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가시면 비단구두"를 살 수 있다는것 이었다.




그날 그 청년은 분명 나와 함께 탑승해 내 옆자리에 앉았다.

대중교통 옆자리는 나에게 언제나 초미의 관심사였다. 총각 때 초급장교로 임관해 군생활을 시작할 무렵에도 나는 지방과 서울을 고속버스로 다녔었다. 그때도 몇 시간 옆자리에 동행할 사람이 너무 뚱뚱하거나 지저분하면 난 많이 힘들어했다. 그래서 몸이 작은 남자나 젊은 여성을 선호했다. 한 번은 정말 아름다운 여성이 신비한 향수냄새까지 풍기며 몇 사람 뒤에 줄을 섰는데 총각귀신은 처녀 귀신에게 홀린 듯 대기줄을 이탈해 다시 그녀 뒤에 줄을 섰다.

 잠시 후 설레는 가슴으로 버스에 탑승한 총각은 울고 말았다. 분명 그녀 뒤에 줄을 섰는데 옆자리가 아닌 통로 건너 옆자리였다. 내 옆에는 뚱뚱한 아주머니가 좌석이 터지듯 앉아있었고 그분은 내 어깨에 기대어 코를 골았다.   


 용산행 기차 옆자리 청년은 키가 크고 대학생 같아 보이는, 앳되지만 눈이 크고 하얀 얼굴에 잘생긴 총각이었다. 귀에는 하얀 아이팟을 끼고 타자마자 나와 눈을 한번 슬쩍 , 어쩌면  불편한 동석자인가 스캔하던 옛날 나처럼, 스치더니 눈을 감고 수면캡슐로 들어갔다.


 기차는 얼마 안 가 쉬익소리를 내며 천안역에 정차했고 사람들은 우르르 빠져나갔다. 차는 잠시동안 정차해 묘한 정적이 흘렀는데 갑자기 고이자던 청년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뛰쳐나갔다.


" 훗, 내리는 걸 놓친 모양이군, 그래도 다행이야 아직 출발 전이라..."        


 기차는 출발하고 나는 좀 더 편하게 쉴 자세로 앉았는데 잠시 후 그 청년이 다시 나타났다.


" 머지? 자다가 내릴 곳이 헷갈린 건가?" 청년은 내 다리를 밀치고 들어와 옆자리에 다시 앉았다.      



기차는 그다음역 평택에 정차했고 청년은 하차했다.  청년이 떠난 좌석 그물망엔 그의 기차표가 남겨져 있었다. 도착역은"천안". 아까 그는 뒤늦게 천안역 하차를 시도했지만 기차 문이 잠겨 있어 하차에 실패하고 평택에 내린듯했다.


아들생각이 났다. 그도 한국에 왔을 때 친구들과 이태원서 놀고 평택 숙소로 가야 했는데 잠들었다가 대전에서 깨고 다시 상행선을 탔는데 용산역이라고 그래서 다시 기차를 타고 평택에 겨우 왔다는 무용담이 생각났다.      


역에 청년이 내리자 사람들이 많이 갈아탔다. 내 뒷좌석에서 처음 느끼는 향수냄새가 훅~ 들어온다. 마스크를 쓰고도 맡을 만큼 강력한데 너무 좋다. " 분명 내가 총각 때 그 냄새만큼 예쁜 여자가 탔을 거야" 속으로 상상하며 웃었다.  이제 총각이 아닌 나는 향수냄새 주인을 확인하려고 뒤를 돌아보지 않다.  나이는 무심함을 매달 저축한다.


용산역에 하차해 지하철을 기다렸다.


아까 향수냄새가 뒤로지나 갔다. 관심이 마음 대부분을 지배하는 무심을 잠시 밀쳐내고 고개를 비쭉 내밀었다. 


" 향수 주인은 어떻게 생겼을까?"


뒤를 돌아 여인의 냄새를 보았다.


중절모에 빨간 와이셔츠, 검정 파카, 아이보리 바지에 하얀 구두, 멋을 낸 촌스런 젊은 노인.


아...    


 후각을 리셋하고 싶어 등을 돌리고 조용히 코를 풀었다.


코푸는 소리에 "레드썬" 꿈에서 깨어났고 나는 시카고 버스의 하차역을 놓치고말았다.


https://youtu.be/VfEFmUeGe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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