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가족이 개떼처럼 시골집을 점령했다.
순식간에 소인들이 살던 서까래 열린 한옥은 <만원사례> 간판을 내걸고 사생활 영업을 중단했다.
집구석은 손님들의 옷가지와 금괴처럼 떠받들어지는 강아지 물건들로 어수선해졌다. 그래봤자 여동생과 조카, 애견 한분이 전부인데 시골집은 동물포함 넷이 살기에는 비좁다. 그저 평소처럼 연구실로 사무실로, 별장처럼 희희낙락 거리며 아기 길고양이 놀려먹는 게 난 좋은데, 하루아침에 일과를 책임질 유럽 관광 가이드가 되었다.
그래도 좋은 점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대로 살았다면 올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아 혀가 굳을 수도 있었다.
글은 나무에라도 새겨놓을 수 있지만 말은 쓰지 않으면 생각쓰레기가 배출되지 않았다.
사람은 가끔 번거로운 존재지만 필요악이기도 하다.
오늘의 일정은 차로 한 시간 이내 도착하는 사백 미터급 작은 산으로 정했다.
산 아래에는 어마무시한 백제 유산이 복원돼 있고 겉보기에도 지자체가 돈이 많구나 싶은 으리으리한 기념관이 있다. 어차피 우리는 개 때문에 개취급 받아 어디를 가나 <애견동반 식당> <애견동반 카페> <반려견 출입>들을 검색하기에 기념관 안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겉만 들여다 본채 산으로 향했다.
사실 산행 준비는 철저히 했다.
스위스 마터호른을 정복할 기세로 비싼 등산복을 챙겨 입고 물과 과일, 혹시 모를 배고픔을 위해 주먹밥도 세르파가 준비했다.
" 낮은 산이니까 한두 시간이면 다녀올 거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산을 동네 뒷산처럼 말했다.
초입은 아주 만만했다. 넓게 정비된 등산로며 마대로 포장된 촉촉한 노면까지 베리굿이었다. 우리 강아지도 처음엔 낯설어 어슬렁 거리더니 이내 야성을 회복하곤 야생동물 냄새를 쫓아 이성을 상실한 채 우리 모두를 달리게 만들었다.
' 야, 좀 천천히 가."
초입에서 가진 여유와 낭만은 산행 초반부터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잠시 후 계단이 나오고 경사가 심해지자 체력은 급소진되고 발은 점점 무거워졌다.
" 좀 쉬다 가자."
메이데이를 외친 건 여자도 개도 아닌, 건장한 세르파였다.
나는 체력도 자신 있었고, 젊을 때는 한국의 명산을 고루 정복한 자칭 산악인이었다.
대학시절, 어머니가 배낭에 억지로 밀어 넣은 개떡 덕분에 살아 돌아온 지리산 개떡 전설을 계속 들려주면 동생은 그만하라면서도 나를 진짜 사나이로 믿었다. 오늘은 조카 들으라고 그 지겨운 무용담을 또 이야기 하면서 산행을 시작했다.
" 삼촌, 보기보다 나약하시네요"
저 아이는 지에미를 닮아서 정곡을 잘 찌른다.
" 다시 출발"
그 소리가 미워 쉬는 시간을 줄여 산행을 재개했고 내려오는 사람과도 하나둘 마주치기 시작했다.
" 비싼 옷, 싸구려, 비싼 옷, 중간, 싸구려"
내려오는 사람과 마주치며 세르파는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에 살 때 안 하던 짓이었다. 이제야 한국인으로 부활하는 모양이다. 나는 동생이 거금 들여 선물한 등산복을 입고. 있는 척하며 걸었고 속으로는 남의 옷을 평가하고 있었다.
내 페르소나는 내 쉐도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오르자 급경사가 나왔다.
강아지(뚱뚱이 코카 스파니엘)는 몇 번이나 미끄러졌고 이젠 안아서 올라야 했다. 건조한 탓에 먼지가 뿌옇게 일고 길은 미끄러웠다. 여차하면 낙상이었다. 동생은 골다공증, 조카는 임신, 사고는 곧 재양이었다.
" 여기서 좀 오래 쉬자. 쉬는 동안 내가 먼저 올라가 보고 확인해 볼게"
나는 일행을 두고 더 가팔라진 산을 혼자 올랐다. 경사가 만만치 않았다.
우습게 생각하던 사백미터 정상이 나를 우습게 내려다보았다.
" 안될 거 같아. 강아지에겐 무리야"
세르파는 강아지에게 투사를 했다. 사실 나도 힘들고 가족의 사고가 더 무서웠으면서.
" 여기가 딱 절반이래 "
동생(honor가)이 내려오는 사람에게 물어보고 하산을 결정했다.
우리는 사백미터 마터호른을 정복하지 못한 채 허탈하게 웃었다.
"주먹밥은 언제 먹어요?'
조카가 물었다.
"집에 가서 먹자"
동생의 웃기는 대답에 나도 맞장구를 쳤다.
" 왜, 코피루왁 원두 있잖아, 고양이 똥 커피, 우린 산을 다녀온 주먹밥이 있어."
산행경험이 많다는 잘난 척 세르파가 의기소침하게 말했다.
하산길은 쉽지만 또 위험했다. 미끄럽고 멈추기 어렵고 발가락도 아팠다.
" 올라오는 사람들이 물으면 딱 절반 왔다고 해, 또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도 하고"
그 말에 가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더 이상 웃기는 세르파를 보고 웃지 않는다.
세르파는 잘난 척, 있는 척, 하는 척하며 웃기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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