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가 되는 일이 작가의 기초인 게야."
영어나라 삶은 내가 알던 국어나라 시스템이 뒤로 밀리고,
피노키오 코처럼 혀가 길어지며 꼬부라지는 새로운 언어 진화의 시간이었다.
머리로는 국어, 입으로 영어를 달고 살아야 하는 생활은
눈치 없는 느림보 돌머리에게
여드름이 너무 크게 자라 아프기도 하고
흉물스러워진 거울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눈치가 빠른 이들은 언어적응도 빠르다)
내 언어는 머리에서 시작해 입으로 오는 동안 번역 되어야 했고
그렇게 입에서 튀어나와 갓 구워진 k-글리쉬 한 문장을 던지고 나서
드론에서 내려다보면 아주 아주 한심했다.
언어 진화의 시간은 계속 흘렀고, 가족의 생존을 책임진 나는 소셜시큐리티 사무실부터 이민국 출입까지 낯선 언어로 그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그들은 절대 친절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독일군은 나쁜 놈, 미군은 착한 놈이라는 TV의 세뇌를 받고 자라났지만 미국은 천사로 가득한 미지의 천국이 아니라 어딘가 바이킹의 나라를 닮았었다.
나는 K-영어의 발음과 스트레스, 악센트 등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처음부터 다시 언어를 재부팅을 해야만 했다.
시험영어에서 실존영어로 가는 길은 그렇게 험난했다.
학교생활은 말해 무엇하랴. 열 명도 안 되는 수업의 토론은 내 자신감과 자존감마저 자근자근 갉아먹었다.
마징가 z를 부르며 미국에 착륙해 가장의 영어에 기대 살던 대 여섯 살짜리 내 아이들도 언어의 혼란을 피해 가지 못했지만, 이제 그들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뒤늦게 자기 장점을 발견해 갱생한 사람처럼
부자 교만에 한껏 부푼 내 땅에 돌아와
또다시 혼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국말을 못 해서가 아니라 쓰지 않아 녹이 슨 내 국어문제였다.
나는 언어란 말기술뿐 아니라 글기술 속에서 화자의 철학과 사상 그리고 가치관이 새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장에는 위의 것에 더해 말할 수 없는 기품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말솜씨나 글솜씨가 빼어나려면 평소 경청을 많이 하고 읽고 생각하는 것이 많아야 한다는 진리도 변함이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거기 그 한가운데 나만의 독창적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것을 찾아야 언어는 상대를 설득하고 감동을 주며 나와 그의 상처를 치유하는 장치가 된다고 정리해 왔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매일 새벽 별똥별 처럼 잠깐 노출되는 브런치 글을 조간신문처럼 읽는다.
열심히 읽고 댓글도 단다. 댓글의 핵심은 수고한 작가의 열매를 먹은 것에 대한 응원이다.
그러다 문득
매일 어두운 글을 발견하기도 하고 매일 밝은 글을 만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퇴고를 하지 않아 지면에 내놓기 힘든 글도 만난다.
어두운 글과 밝은 글에서 분명 온도차이를 느낀다.
어두운 글은 깊이가 있고 단어의 선택이 복잡하며 치밀하고 문장이 난해하다.
밝은 글은 얕아 보이나 선명한 사건을 따라가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분명하다.
원래 나는 깊이보다 높이를 사랑했다.
남을 지배하는 높이 말고, 상승기류를 타고 올라간 곳에서 느끼는 그 자유.
그래서 공군이 되었고 지금도 비행기를 좋아한다.
바다를 보면 가슴이 차분해지고 하늘을 보면 마음이 설렌다.
내 정원의 하늘길을 통과하는 여객기 하나하나에도 관심이 많아 별보다 비행기를 자주 쳐다본다.
이유는 모르지만 하늘에서 추월하는 여객기를 보면 야릇한 흥미를 느낀다.
하지만 글에서는
심연의 깊이가 드러나기를 바라고 쓰며 나 다운 것의 실마리를 잡아 쓰려고 하지만 K영어가 미국에서 잘 안 통하는 것처럼 내 글은 언제나 초라하다.
내 글이 깊이보다 높이를 추구해서 언제나 밝은 쪽이라 그런가.
어둠에서 탄생한 아니 심해에서 고뇌한 타인의 글은 따라갈 수가 없다.
나는 아직 고생을 모르고 살았나?
아님 마음의 회복탄력성이 뛰어난 건가?
또 반문해 본다.
나는 얕은 인간이고 높이를 동경한다 말할밖에.
그래도 나는 아직 내 글을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아직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